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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 경영인의 허영 독일 상징을 망치다

기사승인 [119호] 2020.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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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USINESS] 파산 위기 티센크루프- ① 산업의 아이콘

 유럽 최대 철강회사 티센크루프는 한때 독일 산업의 아이콘이었다. 하지만 수십 년 동안 권력에 취한 남성 경영인이 회사를 좌지우지했고, 그들이 저지른 실수로 만신창이가 되고 말았다. 이제 두 여성이 이 기업을 이끈다. 이들의 경영 방식은 과거와 다르다. 더 나아지고 있는 것일까.

프랑크 도멘 Frank Dohmen
아민 말러 Armin Mahler
<슈피겔> 기자

   
▲ 마르티나 메르츠 신임 티센크루프 최고경영자는 2019년 11월21일 기자회견에서 “많은 사업이 목표치에 크게 미달했고, 재정적으로도 여유가 없다”고 경영 상황을 설명했다. 현재 티센크루프는 파산 위기에 놓였다. REUTERS

2019년 11월21일 오전 마르티나 메르츠가 짙은색 양복을 입은 남성들에 둘러싸여 무대 정중앙에 앉아 있다. 그는 눈에 잘 띄는 빨간색 정장을 입고, 슈바빙 지방 억양으로 말했다. 이런 환경이 익숙하지 않은 듯했다.
10월1일 티센크루프는 보슈 부사장과 섀시브레이크 인터내셔널 최고경영자(CEO) 등을 역임한 메르츠를 최고경영자로 선임했다. 메르츠는 이 회사에서 최초의 여성 CEO다. 위기에 빠진 회사를 회생시키는 임무를 맡길 경험 많은 전문경영인을 찾지 못해 메르츠가 선임됐다.
메르츠는 이날 회사 현황을 미화하지 않았다. 오히려 “많은 사업이 목표치에 크게 미달했고, 재정적으로도 여유가 없다”며 “경제활동도 우리 회사에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다”고 냉정하게 말했다. 모든 것이 절망적으로 들렸다. 암울한 공기를 눈치챈 메르츠는 기자회견 말미에 분위기를 바꾸려고 했다. “티센크루프는 이런 상황에도 잠재력이 있다. 아직 많은 분야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아무도 메르츠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그의 임명 뒤 주가는 14%나 하락해, 11억유로의 시가총액이 증발했다.
티센크루프는 전통적으로 독일 산업계 중심에 있는 기업이다. 절대 무너질 것 같지 않던 회사가 사라질지 모른다는 상상은 독일인에게 공포에 가깝다. 하지만 사실이다. 여러 수치는 과거 향수에 취할 여지를 주지 않는다. 채무가 65억유로에 이르고, 연금 채무 89억유로가 회사 숨통을 조인다. 회사 자기자본은 창업 이래 가장 낮은 수준이다. 이미 2019년 9월 DAX(독일 프랑크푸르트 증권거래소에 상장된 종목 가운데 시가총액 기준 상위 30개 회사로 구성된 종합주가지수)에서 쫓겨났다. 매일 현금을 불태워 겨우 목숨을 부지하지만 서서히 죽음에 다가가고 있다. 파산 가능성도 더는 배제할 수 없다.
이제 티센크루프의 운명은 두 여성에게 달렸다. 마르티나 메르츠 CEO와 최대주주인 크루프재단 이사장 우르줄라 가터다. 앞으로 2주 안에 티센크루프를 어떻게 회생시킬지 결단을 내려야 한다. 유일한 기회는 높은 수익을 내는 엘리베이터를 활용해 자금을 조달하는 것이다. 지분 모두를 팔 것인가, 일부만 팔 것인가. 주식시장에 상장해야 하는가. 자금이 생기면 어디에 써야 하는가. 신규 사업에 투자해야 하나, 아니면 최악을 피하기 위해 부채와 연금 채무를 줄여야 하나.
티센크루프는 이제 단 한 번의 잘못된 결정도 견뎌낼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이미 너무 많이 잘못된 판단을 했다. 막강한 권력을 누린 수많은 경영인이 한때 건실했던 기업을, 과거 영광의 그림자에 기대어 겨우 버티는 기업으로 전락시켰다. 티센크루프는 엘리베이터 부문을 빼고 더는 생존이 불가능한 상태다. 닳아빠진 남성 경영인이 오랜 기간 허영심을 채우고, 권력싸움을 벌인 탓에 임직원 16만 명이 일하는 세계적 기업이 만신창이가 됐다.
오래 지병을 앓아 사망할 때가 됐다고도 볼 수 있다. 그렇게 된다면 루르 지역 최악의 사고가 될 것이다. 이곳은 오랫동안 철강과 석탄 사업으로 번성했다. 석탄산업이 사라진 상황에서 철강산업마저 없어진다면 한때 독일 산업의 심장이던 이곳에는 사회·정치적 논쟁을 빼고는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다. 수많은 사람이 실업자가 되고, 국가가 수십억유로의 연금 채무를 책임져야 한다. 정치인도 경고를 날린다. 노르트드라인베스트팔렌 경제부 장관인 안드레아스 핀크바르트(FDP)는 “티센크루프 회생과 이후 발전은 산업국가 독일의 중요한 과제”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이를 해결하는 일은 어려운 과정이 될 것이다. 자금, 전략, 힘을 모아야 할 기업 소유주 등 모든 것이 부족하다.

스타트업 조언자, 루르 실력자 뒤이어
공항 근처 슈투트가르트 산업단지에 있는 코덴스페이스는 ‘디지털 선구자’를 위한 혁신 캠퍼스다. 여기에 메르츠 CEO의 사무실이 있다. 비밀 유지가 필요한 논의를 할 때, 메르츠는 티센크루프 본사에서 꽤 멀리 떨어진 이곳을 찾는다. 분위기는 지금까지 티센크루프를 만들어온 빌라 휘겔 단지의 부르주아 세계나 루르 지방 실력자와는 간극이 꽤 있다. 이곳에 있을 때, 메르츠는 스타트업 창업자에게 조언해주는 본래 모습을 되찾는다. 젊은이들과 새 아이디어와 사업모델을 논의하는 것을 좋아하는 메르츠는 새로운 유형의 CEO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메르츠가 티센크루프를 성공적으로 이끌지는 아직 미지수다.
메르츠는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보였다. 대기업 경영 경험이 없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불신의 눈빛을 잘 알고 있다. 메르츠가 철강업계에 관해 아는 것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여성이고, 전임자와 업무 형태가 완전히 다르다는 것도 안다.
메르츠는 보슈에서 오랫동안 엔지니어로 일하는 동시에 독일 내 여러 기업 감사회에서 일했다. 스웨덴 자동차 생산업체 볼보그룹 감사회에 있을 때, 메르츠는 체비안캐피털과 친분을 쌓았다. 이 투자회사는 현재 크루프재단 다음으로 많은 티센크루프 주식을 갖고 있다. 티센크루프에서 메르츠는 눈 깜짝할 사이에 경력을 쌓았다. 감사회 의장에 오른 지 1년 만에 CEO에 선임됐다.
현재까지 메르츠는 공식 발언을 자제하고 있다. 우선 신규 자금으로 어떤 사업 분야를 회생할 것인지, 어떤 분야를 구조조정할 것인지 등이다. 그의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는 사업은 정리가 불가피하다. 티센크루프는 그 작업도 견뎌내지 못할 것이다. 몇몇 사업 분야는 비현실적으로 가치가 높게 매겨져 있다. 이 사업을 매각하지 않으면 엄청난 규모의 감가상각이 있을 것이고 이를 메우려면 자기자본을 써야 한다. 어떻게 이런 지경까지 되었을까. 왜 산업계 아이콘이던 티센크루프가 비극적인 구조조정에 직면하게 됐을까.

   
▲ 99살의 베르톨트 바이츠 크루프재단 이사장이 2013년 1월21일 열린 주주총회에 참석했다. 그는 티센크루프그룹 내에서 막강한 권력을 누렸다. REUTERS

조상인 바이츠와 휘겔 정신
이 질문에 답을 구하려면 독일 경제 역사를 깊게 들여다봐야 한다. 티센크루프 몰락은 크루프 가문 역사와 겹쳐 있다. 특히 유언 집행자로서 크루프의 마지막 유산을 지키는 동시에 자신의 영광도 중요하게 여겼던 베르톨트 바이츠 없이는 현재 드라마를 이해할 수 없다. 바르츠는 모든 권세를 갖고, 그룹을 움직였다. 후임자 역시 그룹의 성공이 아닌, 자신이 전지전능한 바이츠처럼 되기를 원할 뿐이었다. 바이츠만 없었다면, 티센크루프 대주주인 크루프재단이 회사의 중심을 확고히 잡아주는 견고한 닻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크루프재단은 1873년 알프레트 크루프가 에센 지방 브레데나이의 28ha 공원에 8100㎡ 규모로 지은 빌라 휘겔의 부속 건물에 있다. 빌라 휘겔 정신이 지금의 티센크루프를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철강과 무기제련소를 물려받은 알프레트 크루프는 대외적으로 기업을 대표할, 젊고 에너지 넘치며 전과 없는 사람을 찾던 끝에, 1951년 베르톨트 바이츠를 발굴했다. 바이츠는 회사 대표에 선임됐고 나중에 유언 집행자가 됐다. 그는 재능 있는 홍보맨이자 세계인으로서 외국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썩 좋은 경영인은 아니었다. 그가 임명한 경영인도 그러했다. “바이츠는 사람을 잘 볼 줄 모르는 것이 자기의 가장 큰 단점이라고 생각했다”고 측근이 말했다.
1967년 알프레트가 죽은 뒤 바이츠는 자신이 크루프 가문의 마지막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측근은 “그가 신처럼 모든 것을 지배했다”고 떠올렸다. 이사회 사람은 자주 교체됐고, 바이츠는 모든 것을 원하는 대로 했다. 그는 대표 자리에서 물러날 생각이 없었고, 누구에게도 회사를 맡기려 하지 않았다.
크루프 직원 9만 명은 위기 때마다 필사적으로 버텼다. 하지만 철강업계 경기와 낡은 공장 시설이 발목을 잡았다. 구조조정과 개혁은 이뤄지지 않았다. 회사 안에선 “크루프(Krupp)라는 이름이 예비자금도 없고 실제로 파산한 것(Keine Reserven und praktisch pleite)을 의미한다”고 빈정거리는 이들도 있었다.
1990년대 후반 크루프는 재차 위기에 놓였다. 당시 CEO 게르하르트 크롬은 대담한 계획을 세웠다. 크루프보다 몸집이 큰 라이벌 티센을 적대적으로 인수하려고 했다. 이 계획은 실패했다. 하지만 결국 두 회사는 철강 분야를 합병했고, 나중에는 다른 사업도 합쳤다. 이로써 독일에서 일곱 번째로 큰 제조업 회사 티센크루프가 탄생했다.
공식적으로 보면 크루프 쪽, 즉 바이츠는 합병으로 많은 힘을 잃었다. 과거 알프레트는 그의 회사 지분을 크루프재단에 증여했다. 합병으로 재단 주식 비율은 21%로 내려갔다. 그럼에도 대주주는 여전히 재단이었고, 바이츠는 이를 이용했다. 그가 원하면 뭐든 가능했다.
티센의 디터 포겔 회장이 즉각 이를 눈치챘다. 그는 자신이 당연히 새롭게 합병한 대기업의 회장이 되리라고 여겨 원대한 계획을 세웠다. 철강업 주식을 상장하고, 이동통신사(E-Plus)를 매각한 돈으로 몇몇 회사를 인수하려 했다. 그의 인수 후보 목록에는 50개 회사가 있었다.
바이츠는 다른 계획이 있었다. 그는 측근 크롬을 회사 CEO로 세우려 했고, 이 경우 포겔이 물러나야 했다. 하지만 크롬이 CEO가 되는 것은 불가능했다. 티센 쪽 고문변호사가 크롬을 크루프에게 잘 보이려 무엇이든 하는 출세주의자로 봤기 때문이다.
바이츠와 티센 감사회는 크롬과 티센의 철강 분야 CEO 에케하르트 슐츠가 공동으로 회사를 운영하는 타협안에 동의했다. 하지만 이 타협안은 둘 사이에 경쟁관계를 형성해 티센크루프를 망치는 결과를 초래했다.
처음 두 사람의 충돌은 막대한 자본력으로 감출 수 있었다. 합병 때 티센이 150억마르크의 자기자본을 가져왔고, 두 CEO는 이 돈을 물 쓰듯 썼다. 포겔이 협상을 벌이던 핀란드 엘리베이터 제조사 코네(Kone) 인수와 철강 분야 상장도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대형 합병의 약점이 금세 드러났다. 에센 본사, 즉 크루프재단이 조종하는 크루프 시스템은 힘이 분산된 티센의 구조와 맞지 않았다. 각각 경영부서에서 일했던 크루프와 티센의 직원은 서로를 믿지 못했다. 비용 감축이 필요했지만 허리끈을 졸라매지도, 구조조정을 단행하지도 않았다. 인수·합병은 되지 않았고, 철강 분야 상장도 실패했다. 티센크루프는 방향을 잃은 채 위기에 빠졌다. 주가는 2년 동안 50%나 하락했다.

   
▲ 베르톨트 바이츠 크루프재단 이사장(왼쪽)과 게르하르트 크롬 전 티센크루프 최고경영자는 회사 경영보다 자신의 권력 유지에 더 관심이 높아, 티센크루프 위기를 초래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REUTERS

맹그로브 늪지에 수십억 투자
슐츠와 크롬은 회사에 위험경보가 울렸지만 위기에서 탈출하도록 회사를 이끌기는커녕 더 깊은 수렁 속으로 밀어넣었다. 크롬이 최악의 상황에서 빠져나오면서 동시에 그의 인생 목표에 한 발짝 더 다가갈 방법을 고안해냈기 때문이다. 크루프재단 우두머리인 바이츠의 후계자가 되는 것이 목표였던 그는, 감사회 의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슐츠는 환갑의 나이에 회사 경영을 홀로 떠맡았다. 슐츠는 과거 철강업 영광을 되찾을 기회를 엿봤다. 철강업은 중국과 다른 개발도상국의 경제 수준이 향상되면서 전례 없는 호황을 맞았다. 동시에 인도의 부호이자 옛 철강소를 사서 부활시키는 일을 하는 락슈미 미탈 같은 이가 사업에 뛰어들었다.
슐츠는 이제는 철강업계 중심인물이 아니었다. 생산 규모에 따라 자리가 배정되는 철강업계 연례회의에서 두 번째 줄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실패로 돌아간 캐나다 경쟁업체 인수를 만회하기 위해 2곳에 새로 철강공장을 지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중 하나는 브라질 광산이 있는 곳으로, 원자재 가격과 인건비가 낮아 저렴하게 제품을 생산할 수 있었다. 또 다른 곳은 미국 앨라배마에 짓는다는 계획이었다. 브라질에서 생산한 철판을 이곳에서 자동차용 철판으로 가공한다는 복안이었다. 슐츠는 “100년을 내다본 계획”이라고 환호했다. 2005년 11월30일 감사회는 브라질 공장 건립 계획을 승인했다. 하지만 이 계획은 앞으로 100년 동안 극복해야 할 완벽한 실패였다.
철강공장 건립은 처음부터 삐걱거렸다. 연이어 악재가 터졌다. 맹그로브 늪지대에 있던 브라질 공장 예정 터는 무거운 기계뿐 아니라 공장 바닥도 가라앉는 곳이었다. 이 제련소 건설을 전문 기업이 아닌 중국 회사에 맡겼는데 제대로 일을 못했다. 브라질에서 생산하는 철판이 없으면 앨라배마 공장도 100% 가동이 불가능하다. 슐츠는 수개월 동안 참고 기다리면 이 공장이 엄청난 이익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다른 사람들을 설득했지만 전망은 빗나갔다. 그사이 철강산업이 침체기를 맞았다. 게다가 중국, 한국, 러시아가 철강공장을 짓기 시작했다. 공급과잉이 불 보듯 뻔했다. 감가상각만으로 2011년 18억유로의 적자를 기록했다.
바이츠와 크롬은 이를 막지 않았다. 티센크루프에 재앙이 닥치는 걸 알면서도 이들은 묵인했다. 오로지 이들의 관심은 기업 번성과 수익이 아니라 개인의 부와 명예, 자존심뿐이었다. 크롬은 슐츠를 선뜻 해고하지 못했다. 바이츠의 총애를 받는 슐츠를 지지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바이츠와 슐츠는 당시 사냥에 푹 빠져 있었다. 바이츠는 종종 법인 소유 비행기를 타고 개인 사냥터가 있는 오스트리아 게를로스에 가서 슐츠를 만났다.
크롬은 사냥과 남성성으로 똘똘 뭉친 바이츠와 슐츠에 맞서려고 노력했다. 둘이 함께하는 행사는, 심지어 알프레트 크루프 무덤에 공동으로 헌화하는 일도 축하받아야 했고, 크롬 홍보팀에서 행사를 조직해야 했다. 이들은 이 과정이 선택받은 사람이라는 걸 입증한다고 여겼다. 에센에 있는 크루프의 옛 본사와 별개로 슐츠와 크롬은 웅장한 사옥을 세웠다. 바이츠에게 합병의 숨은 승리자라는 기분을 느끼게 해줄 권력의 대성당이었다.

   
▲ 티센크루프 용광로 공장에서 작업하는 노동자. 유럽 최대 철강회사인 티센크루프는 한때 독일 산업의 아이콘이었다. REUTERS

크롬과 슐츠 시대의 끔찍한 계산서
크롬의 희망에도 93살 바이츠는 은퇴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곧 닥칠 회사의 재앙을 피할 기미도 안 보였다. 바이츠뿐 아니라 슐츠도 은퇴하지 않고 회사에 머물렀다. 수십억달러의 감가상각과 대대적인 손실에도, 2011년 70대 슐츠가 명예롭게 은퇴할 때까지 이런 상황이 유지됐다. 심지어 슐츠가 감사회로 자리를 옮겼고, 크롬은 감사회 의장으로 남았다.
슐츠와 크롬의 자기중심적인 태도는 티센크루프에 막대한 금전적 손실을 가져왔다. 2011년 이 그룹은 20억유로를 감가상각으로 잃은 뒤, 그 이듬해 다시 30억유로의 가치 조정을 해야 할 위험에 직면했다.
크롬은 슐츠 후임으로 지멘스 최고경영자이던 하인리히 히징거를 선택했다. 히징거가 볼 때, 회사는 절망적이었다. 브라질과 앨라배마 철강공장은 절대 이익을 낼 수 없었다. 다른 사업 분야도 마찬가지로 흔들렸다.
공정거래위원회도 티센크루프에 경고했다. 검찰은 이사회와 기자가 브라질과 마이애미로 대규모 외유를 다녀온 일을 조사했다. 법인 비행기로 오스트리아 사냥터에 가고, 사냥 동물 비용을 회사 자금으로 결제한 것은 내부 감찰 대상이 됐다. 당시 이사 중 한 명은 “모든 것이 끔찍했고, 회사 명성에 해를 입혔다”고 회고했다. 공정거래위원회 조사 결과는 회사에 큰 타격을 입혔다. 티센크루프가 엘리베이터·철로·철판 가격을 독점적으로 결정한 사실이 밝혀졌고, 9억유로에 이르는 벌금을 물어야 했다.
슐츠와 크롬 시대의 끝자락, 티센크루프는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재무 상황이 바닥을 쳤고, 도덕적으로도 망가졌다. 내부 감사 결과, 규칙과 규정이 전무한 회사로 드러났다. 감사회도 제 역할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2011년 말 슐츠는 사태에 책임지고 감사회에서 사임했다. 현재까지 그는 깊이 반성하지 않고 있다. 브라질과 앨라배마 철강공장 건설 결정이 실수가 아니라고 했다. 계속 보유했다면 좋은 사업 기회가 되었을 것이라고 아직도 믿고 있다. 크롬 역시 죄책을 느끼지 않았다. 측근에 따르면, 미국 공장은 감사회가 속아서 사기를 당한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감사회가 의무를 다했음을 증명하기 위해 법률 감정도 받았다. 현재 그는 아무런 발언도 하지 않고 있다. 2012년 12월 크롬은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이사회를 나왔다.
이전부터 바이츠는 크롬이 회사를 물려받기에 적합한 사람인지 의심했다. 2012년 12월, 99살 생일을 앞둔 바이츠는 <슈피겔>에 “현재 티센크루프에 벌어지는 일에 크게 실망하고 있다”고 말했다. 몇 주 뒤 크롬은 감사회 의장과 크루프재단 이사회 자리에서 사임해야 했다. 휘겔의 우두머리가 되겠다는 꿈은 물거품이 됐고, 바이츠의 후계자 자리는 공석으로 남았다.
바이츠는 더 이상 누구도 추천하지 않았다. 그가 자신만의 방식으로 신처럼 남아 있기를 바랐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혹은 그가 2013년 7월 죽을 때까지 아무도 믿지 못해 그럴 수도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그때의 실패가 현재까지 티센크루프에 족쇄가 되고 있다. 기업의 미래를 지키기 위해 세운 재단은 가장 큰 짐으로 전락했다.

ⓒ Der Spiegel 2020년 3호
Tod auf Raten
번역 이상익 위원

프랑크 도멘 economyinsigh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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