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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행 역할론 ‘급부상’

기사승인 [121호] 2020.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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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VER STORY] 코로나 이후 한국경제 어디로- ② 금융

 박종오 <이데일리> 기자

   
▲ 코로나19로 실물경제 위기가 금융시장 불안과 기업 줄도산으로 확산하는 것을 막기 위해, 한국은행도 미국 연방준비제도처럼 발권력을 동원하는 등 더 적극적으로 나서라는 주문이 거세다. 하나은행 본점 위변조대응센터에서 직원이 달러화를 정리하고 있다. 연합뉴스

“무기명채권을 발행해 코로나19 대응 재원을 마련하겠다.”
2020년 4월 초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에서 이런 방안이 논의된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논란이 일었다. 무기명채권은 돈 빌려주는 사람 이름이 적혀 있지 않은 채권이다. 보유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으니 자산가가 이 채권을 사서 자녀에게 물려줘도 정부가 상속세나 증여세를 물릴 수 없다. 부자의 합법적인 세금 회피 수단인 것이다.
불평등을 완화하겠다며 ‘소득주도성장’이란 표어를 내걸고 집권한 여당이 왜 자기네 정체성에 반하는 정책 아이디어를 내놨을까. “코로나19로 금융시장 불안을 막으려면 정부도 막대한 재원이 필요하다. 그런데 지금 자산가들은 돈 쓸 데가 없다고 난리지 않나. 이런 민간의 여유 자금을 끌어들여 기업 회사채나 어음 등을 사는 데 쓰면 어떻겠냐는 생각에서 나온 안이다.” 민주당 금융안정 태스크포스에 참가한 관계자가 말했다.
논란이 이어지자 이 아이디어를 처음 제시한 최운열 민주당 의원은 “무기명채권 발행은 개인적으로 검토한 것”이라며 급히 진화에 나섰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정부가 시중에 100조원 넘는 돈을 풀어 코로나19 대응에 쓰겠다고 한 게 불과 며칠 전이어서다. 100조원도 부족하다는 것일까? 시곗바늘을 일주일 전으로 되돌려보자.
정부는 3월24일 문재인 대통령이 주재한 비상경제회의 뒤 ‘금융시장 안정화 방안’을 발표했다. 코로나19로 어려움을 겪는 자영업자와 기업에 지원 규모를 50조원에서 100조원으로 두 배 확대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이날 금융 당국 수장인 은성수 금융위원장은 “지원 규모를 과감히 늘려 기업과 금융시장에 충분한 자금을 공급하겠다”고 했다. 정부는 자영업자와 중소·중견기업 지원액을 58조원으로 확대했다. 특히 금융시장 안정자금 42조원을 추가 편성했다.

100조원 풀었지만… 민간 금융사 돈 절반 넘어
42조원의 70%가 넘는 31조원은 기업이 발행하는 회사채와 어음 등 자금시장에 투입하기로 했다. 코로나19로 기업 부실 위험이 커지며 투자자들이 회사채와 기업어음 투자를 꺼려서다. 기업 자금줄이 말라붙게 생겼다는 얘기다. 나머지 11조원은 주식시장에 넣어 증시를 떠받치는 데 쓴다. 문제는 이 돈을 누가 대느냐다. “충분한 자금을 공급하겠다”는 은 위원장의 발언에는 주어가 없다. 사실 이 돈 대부분은 정부가 대지 않는다. 민간 금융회사가 부담한다.
예를 들어 기업 회사채와 어음을 사들이는 20조원 규모 ‘채권시장 안정 펀드’(채안펀드)와 주식시장에 투자하는 11조원 규모 ‘증권시장 안정 펀드’(증안펀드)의 밑천은 은행·보험사·증권사 등 민간 금융기관이 내놓은 돈이다. 전체 금융지원액 100조원 가운데 국책은행이 직접 자금을 대출해주거나 민간기업의 회사채를 사주는 등 정부가 실제 부담하는 금액은 절반 이하인 40조원 수준에 그친다.
이처럼 민간자금을 끌어오면 정책 집행에도 한계가 생긴다. ‘손실 최소화’ 원칙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정부가 부실 책임을 지고 필요한 곳에 돈을 쏟아붓기 어렵다는 이야기다.

‘손실 최소화’ 원칙에 자금 집행도 보수적
실제로 그랬다. 한화그룹의 핵심 계열사인 한화솔루션(옛 한화케미칼)은 4월13일 회사채 2100억원어치를 발행하기 위해 기관투자가를 상대로 수요 예측 절차를 진행했다. 그러나 유효 매수 주문이 600억원에 그쳤다. 채안펀드는 아예 참여하지 않았다. 한화솔루션의 신용등급 전망이 최근 ‘안정적’에서 ‘부정적’으로 강등됐다는 이유에서다.
기업의 신용등급은 회사가 빌린 돈을 얼마나 잘 갚을 수 있는지 보여주는 지표다. 한화솔루션의 신용등급은 ‘더블 에이 마이너스’(AA-)다. 전체 10개 등급 중 ‘트리플 에이’(AAA) 다음으로 높은 우량 등급이다. 그런데도 앞으로 신용등급이 한 단계 낮은 ‘싱글 에이’(A)로 하향 조정될 수 있다는 우려로 펀드 자금을 투입하지 않은 것이다.
기업은 불만이다. 채안펀드 운용이 너무 보수적이라는 이유에서다. 한화 같은 대기업도 자격 미달 판정을 받는다면 삼성과 SK 등 일부 초우량 기업을 제외한 대다수 회사는 채안펀드 지원을 기대할 수 없다. 펀드 자금 20조원이 ‘그림의 떡’이라는 뜻이다.
2020년 4~12월 만기가 돌아오는 회사채 23조원 가운데 3분의 1인 7조5천억원가량은 한화솔루션보다 신용등급이 낮은 회사의 발행량이다. 코로나19로 직격탄을 맞은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 CJ CGV, 구조조정이 진행 중인 두산중공업, 두산인프라코어 등이 여기에 속한다.
이런 회사는 정부 지원 없이 자체적으로 새 회사채를 발행해 만기에 도래하는 빚을 갚기 어렵다. 금융투자협회 통계를 보면 만기 3년인 더블에이 등급 회사채 금리와 국고채 금리의 격차는 3월14일 현재 1.13%포인트로 연초보다 2배 넘게 확대됐다. 세계 금융위기 발생 당시인 2010년 3월4일(1.13%)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이다.
채권은 사려는 사람이 많으면 가격이 오르고 금리는 거꾸로 내린다. 회사채와 돈 떼일 위험이 없는 국고채의 금리 차이가 벌어진 것은 정반대 상황이 벌어졌다는 의미다. 회사채 투자 수요가 급감하면서 금리가 뛴 것이다. 김민정 한화투자증권 연구원은 “정부 대책에도 여전히 회사채 시장이 안정됐다고 보긴 어렵다”면서 “기업의 자금경색이 여전하다”고 지적했다.
급기야 3월6일 은성수 금융위원장은 민간 업계에 공개 서한을 보냈다. 정부의 코로나19 대응이 소극적이라는 비판이 끊이지 않자 직접 해명에 나선 것이다. 대응 방법은 달랐으나 여당 일각에서 무기명채권 발행이라는 초법적 발상까지 짜낸 것도 결국 같은 이유 때문이다. 사상 최대인 100조원 규모 금융지원책을 내놨지만 민간자금에 의존하는 방식으로는 금융시장 불안을 잠재우는 데 쓸 돈이 부족했던 것이다.

미국 중앙은행이 총대… 한은 역할론 부상
미국은 달랐다. 정부도, 민간 금융회사도 아닌 중앙은행이 직접 총대를 멨다.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연준)는 정책 대응 속도가 빨랐을 뿐 아니라 지원 규모와 방식도 이례적이었다.
연준이 돈을 찍어 특수목적회사에 빌려주면 특수목적회사가 이 돈으로 기업이 발행한 회사채를 사들이기로 했다. 금융위기 때도 도입하지 않았던 초유의 대책이다. 특히 코로나19로 신용등급이 투기등급으로 떨어진 포드·델타항공 등 이른바 ‘타락 천사’ 기업의 회사채까지 매입하기로 했다. 돈 떼일 위험이 있어도 중앙은행 자금을 넣어 파산을 막겠다는 것이다.
“할 수 있는 모든 조처를 다했다.” 연준을 향한 시장 평가는 이렇다. 미국은 코로나19 사태 이후 시장 거품을 걱정하는 처지다. 한국과는 사정이 딴판이다.
공은 한국은행으로 넘어왔다. 기준금리(정책금리)만 낮출 것이 아니라 미국 연준처럼 돈을 찍어 금융시장 안정에 투입해야 한다는 요구가 거세다. 코로나19로 실물경제 위기가 금융시장 불안과 기업 줄도산으로 확산하는 것을 막는 데 더 적극적으로 나서라는 주문이다.
증권사 등 제2금융권에 직접 담보대출을 해주는 것을 넘어, 미국 연준처럼 특수목적법인을 세워 회사채와 기업어음을 매입하는 방안이 도마 위에 올랐다. 다만 한국은행은 정부에, 정부는 다시 한은에 결정 권한을 미루는 모양새다. 중앙은행의 기업대출에 뒤따를 특혜 시비와 적정성 논란 때문이다.
차현진 한은 인재개발원 교수는 “한은이 투자 적격 등급에서 투기 등급으로 넘어가려는 기업의 회사채를 사주는 등 지원 대상을 특정 회사가 아니라 일정 요건의 채권으로 한정하면 특혜 논란이 생기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성태윤 연세대 교수(경제학부)도 “우리나라가 기축통화국이 아니어서 한은도 미국 연준처럼 발권력을 이용해 시장 안정에 적극적으로 나서기 부담스럽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면서도 “연준이 하는 것처럼 회사채 지원 조건을 먼저 정해놓고 그 조건에 맞는 기업을 지원한다면 불필요한 논란을 피하고 시장 안정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조언했다.

ⓒ 이코노미 인사이트 2020년 5월호

박종오 pjo22@edaily.co.kr

<저작권자 © 이코노미인사이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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