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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의 시작, 바이러스가 있었다

기사승인 [122호] 2020.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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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VER STORY] 각성- ① 붕괴

 코로나19 습격으로 인류가 만들어온 세계질서가 전례 없는 붕괴 중에 있다. 세계 인구 절반은 집 안에 갇혔고, 180여 개국이 기나긴 경기침체 터널로 들어갈 전망이다. 세계무역기구(WTO)는 2020년 국제 교역량이 13~32% 줄어들 것으로 본다. 전대미문의 상황을 맞은 인류 공동체는 더 공정하고 안전하고 지속가능한 사회로 갈 수 있을까. _편집자

울리히 피히트너 Ullrich Fichtner <슈피겔> 기자

   
▲ 중국 베이징에서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COVID-19) 발병 이후, 쇼핑몰의 푸드코트에서 방역 마스크를 쓴 사람들이 음식을 주문하고 있다. 코로나19는 전세계 180개국을 경기침체 터널로 밀어넣었다.REUTERS

우리가 2020년 2월에만 해도 ‘노멀’하다고 여긴 세상은 전례 없는 붕괴 중에 있다. 전세계 인구 절반가량은 정도 차이는 있지만 외출금지령에 따라 집에만 머물고 있다. 가난한 지역과 부유한 지역, 대도시와 시골을 가리지 않고 세계가 바이러스 직격탄을 맞았다. 세계경제 대부분이 멈춰 섰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지속적인 경제성장과 부의 증대를 당연하게 여겼던 180여 개국은 기나긴 경기침체 터널로 접어들었다.
관광업과 국제 교통망 붕괴, 멈춰선 도시 풍경은 세계 곳곳에서 도매업, 제조업, 서비스업, 스포츠, 문화, 예술, 레저 활동 등 사람들의 일상에 심대한 타격을 주고 있다. 세계무역기구(WTO)는 2020년 국제 교역량이 13~32% 줄어들 것이라고 내다본다. 충격적인 수치다. 기업과 국가의 부도로 이어질 것이다. 반란이나 혁명이 일어날 수도 있을 만큼 중차대한 상황이다.
미국 노동시장이 눈 깜짝할 사이 역대급 긍정 수치에서 역대급 부정 수치로 돌변한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다. 4주 동안 미국인 2200만 명 정도가 일자리를 잃었고, 이코노미스트들은 여름 미국 실업률이 32%까지 치솟을 수도 있다고 예측한다.
미국 컬럼비아대학 애덤 투즈 역사학 교수는 1929년 세계 대공황 때처럼 세계경제가 계속 하강 곡선을 그린다면 미국 경제는 25% 정도 마이너스 성장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세계 대공황 때 경기침체가 4년 동안 지속했다면 지금 경기침체는 불과 수개월 사이 압축적으로 일어났다는 것이다. 투즈 교수는 미국 외교전문지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기고문에 “이런 불시착은 전무후무하다”고 했다. 미국에 한정된 일이 아니라 전세계에 적용될 수 있다.
선진국은 팬데믹의 직접적 유탄을 막고, 대량 실업과 기업 파산을 막기 위해 양적완화 정책을 펼치고 있다. 어느 정도 설득력 있는 정책이지만, 누구도 드러난 구조적 문제를 부정할 수 없다. 지금 문 닫은 수많은 매장과 식당은 다시 문을 열지 못할 수도 있다. 어제까지만 해도 밤낮없이 가동되던 전세계 수많은 공장이 기약 없이 문을 닫은 상태다.
봉쇄 완화와 생산 재개 논의는 언급할 가치도 없다는 게 머잖아 드러날 것이다. 경제를 행정명령으로 즉각 멈춰 세우는 것과, 몇 주 혹은 몇 달 멈춘 경제를 재가동하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이런 상황에선 자잘한 수많은 퍼즐 조각으로 맞춰진 생산체제에서 최종 생산을 위해 단 한 조각이 모자라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 구멍을 메우려면 시간이 필요하고, 생산 방식에서 근본적 재고가 필요하다. 잘 알려진 대로 공급망이 긴 글로벌 경제에서 한 국가만 홀로 새 시작을 할 수 없는 노릇이다. 독일이 특히 그렇다.
국제 자본주의의 물샐 틈 없는 빼곡한 사업계획이 불확실성에 점령되고 있다. 2008년 금융위기 때 생겨난 용어로 발생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사태를 가리키는 ‘블랙 스완’(Black Swan)은 코로나19 위기에서 세계경제를 대표하는 상징이 됐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걱정에 불과한 ‘극단적인 불확실’은 이제 ‘항상 존재하는 실제’가 됐다고 투즈 교수는 지적한다. 깨진 옛것을 고쳐 쓰는 것보다 아예 새로 시작하는 게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 말레이시아가 이슬람 사원에서 집단 기도 금지를 완화함에 따라, 마스크를 쓰고 ‘사회적 거리 두기’ 조처를 따르는 이슬람교도들이 사원에서 기도하고 있다. 코로나19는 인간에게 어떤 각성을 주게 될까. REUTERS

코로나, “21세기 인류의 가장 어두운 순간”
더는 과거로 되돌아갈 수 없다는 말을 모두가 한다. 요슈카 피셔 전 독일 외무장관은 독일 최대 일간지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FAZ)에서 코로나19 위기는 “21세기 인류의 첫 위기”라고 했다. 티에리 브레통 유럽연합(EU) 단일시장 담당 집행위원은 “밀접하게 연계된 각 대륙이 코로나19를 계기로 다시 독립적으로 움직일 것”이라고 내다본다. 크리스탈리나 게오르기에바 국제통화기금 총재는 코로나19 위기를 “인류의 가장 어두운 순간”이라고 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코로나19 위기에 직면해 위선을 벗어던지고 회개할 시간이 왔다”고 말했다. 거대 자산운용업체 블랙록의 래리 핑크 CEO는 고객에게 보낸 편지에서 “세계는 불확실해질 것”이라고 했다.
지위, 권력, 자본을 가진 사람 모두가 세상이 급변하고 새로운 세계가 시작되리라고 확신한다. 정말 그럴까? 누구나 흙 한 줌으로 돌아가게 하는 죽음이 결국 인류를 더 나은 존재로 만들 수 있을까? 전세계를 잠시 멈춰 세운 코로나19가 위험뿐만 아니라 구원의 씨앗도 자라게 하는 ‘공포의 순간’과, 지엽적인 것과 본질적인 것을 구분해 핵심에 집중하게 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코로나19 위기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뜻의 라틴어)를 기치로 전세계를 아우르는 순간이자 치유의 충격이 될 것이다. 메멘토 모리의 21세기형 버전으로 코로나19 버전이 생겨날까? 우리는 생활방식을 바꿔야 한다는 인식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가? 현대 경제활동에는 너무 많은 오류가 있다는 생각을, 대량소비와 자원소비 광기가 더는 지속할 수 없다는 생각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가?
코로나19 초기 상황을 보면 고무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유럽연합 회원국 재무장관이 벨기에 브뤼셀에서 셀 수 없이 많은 기나긴 밤을 보낸 뒤에야 언론 카메라 앞에서 복잡한 긴급지원 합의문을 발표했다. 이 과정에서 여과 없이 드러낸 지리멸렬함은 새 시대 시작과는 한참 동떨어져 보였다. 코로나19에 심각한 타격을 입은 이탈리아 등의 회원국 지원을 두고 네덜란드가 지원금에 조건을 부여하자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이에 독일이 굳이 반대하지 않는 것은 유럽연합에서 흔히 볼 수 있던 풍경이다.
유럽연합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위기에 대처하는 모습을 보면 씁쓸하고도 충격적이다. 마스크와 보호장비를 둘러싼 국가 간 꼴불견 경쟁, 국경 폐쇄와 긴급지원금을 둘러싸고 각 회원국의 독단적인 결정은 새 시대, 특히 긍정적인 시대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영국 런던의 일부 헤지펀드가 코로나19 위기에 따른 주가 폭락으로 엄청난 수익을 누린 것은 ‘카지노 자본주의’(정보기술 발달로 국제 금융시장이 통합되면서 나타나는 자본주의의 부정적 측면을 가리키는 말)의 추악한 단면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코로나19, 인류 역사의 변곡점 되나
하필 유럽에서 각 회원국은 코로나19 위기와 함께 국가로서 어두운 모습을 드러내며 헛발질을 남발하고 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의 역사적인 TV 연설에는 유럽연합 언급이 전혀 없었다. 이웃 나라나 국제 협력을 위한 어떠 고민도 담겨 있지 않았다. ‘유럽’이란 말은 아예 나오지도 않았다. 메르켈 총리는 독일인을 오로지 국경 안에만 존재하는 사람으로 제한했다.
나머지 유럽 국가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프랑스, 스페인, 오스트리아, 스웨덴, 영국, 헝가리 등도 국가 차원의 코로나19 위기 대처에만 매몰돼 있다. 유럽의 공동 대처는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다. 공동 목표란 거의 없고, 유럽은 자국의 좁은 틀 안에 갇혀 전세계를 바라본다.
국경을 닫지 말라는 국제보건 전문가의 조언이나 세계보건기구 요청은 아예 무시되고 있다. 관세청과 국경수비대가 마치 난민과 더불어 바이러스도 막을 수 있을 것처럼 유럽 국경은 굳게 닫혔다. 논란은 여전하다. 국경을 두고 맞닿은 프랑스 동부와 독일 서부를 주변 지역이 아닌 열린 공간으로 성찰했다면 얼마나 많은 고통을 막을 수 있었을까? 프랑스와 독일이 국경 지역을 공동의 위기 지역으로 인식했다면 어떠했을까? 프랑스와 독일 국경 지역은 바이러스라는 공동의 적 앞에서 비슷한 문제로 고통받고 있다.
독일 국경과 맞붙은 프랑스 알자스 지방 중환자들이 코로나19 확산 초기에 인근 독일 병원의 비어 있는 중환자실 대신 멀리 떨어진 프랑스 병원으로 이송된 것은 나쁜 관행이다. 유럽의 가장 막강한 국가인 독일에서 이번에도 유럽연합에 힘을 실어줄 동력이 전혀 나오지 않은 건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일이다. 브뤼셀의 유럽연합 집행위원회는 힘이 없고 회원국도 이를 원치 않는다는 건 이번에도 분명해졌다. 오래된 국가주의적 사고는 사람들 머릿속에 여전히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바이러스 전파가 마치 개별 국가 문제처럼 정치 지형에도 치환될지는 사소한 것에서 드러난다. 나라마다 코로나19 대처 현황을 보여주는 ‘국가별 코로나19 현황’ 색상이 대표 사례다. 그래프 곡선은 한국 같은 모범 방역국과 미국처럼 상황이 심각한 국가별로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보인다. 국가별 마스크 재고를 세고, 국가별 응급실 병상 수는 자부심과 모멸감을 자아내는 비교 대상이 된다. 냉소적으로 들리겠지만, 일일 신규 감염자·사망자 수는 으스스한 올림픽 메달 순위를 보는 듯하다. 이 모든 것이 고무적인 현상은 아니다.
코로나19가 인류 역사의 변곡점을 찍는다면 아직 그 지점에 도달하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변곡점을 지나야만 비로소 포스트 코로나19 시대가 열릴 것이다. 하지만 새롭고 더 나은 미래를 향한 계획조차 시작되지 않았다는 것이 현재 지배적인 분위기다. 현시점에선 일상으로 되돌아가는 데 모든 역량이 맞춰 있는 것 같다.
독일 정부의 긴급지원금 7500억유로(약 999조5천억원)를 포함해 각국 정부의 긴급지원금은 마치 코로나19 사태가 없었던 것처럼 코로나19 이전 일상으로 돌아가는 데 초점이 맞춰 있다. 각국 정부의 긴급지원금은 코로나19 피해는 복구가 가능하며, 피해 복구 이후에는 예전처럼 모든 게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리라고 기대하는 듯하다. 하지만 그럴 확률은 아주 낮다. 그렇게 된다면 전세계는 코로나19 재해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않았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
유럽연합 재무장관과 중앙은행은 전무후무한 현금을 쏟아붓고 있다.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으로 황폐해진 유럽을 일으키기 위해 세운 유럽 부흥 계획 ‘마셜플랜’과 비교하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마셜플랜의 총규모는 130억달러로,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1300억유로에 이른다.

   
▲ 코로나19 확산이 고비를 넘기면서 일본 정부는 2020년 5월 중순 전국에 발령한 긴급사태 선언을 39개 현에서 해제했다. 일본 도쿄의 한 신사에서 방역 마스크를 쓴 사람들이 걷고 있다. REUTERS

기존 세상의 연장이냐 전환이냐
독일 정부는 코로나19 위기에 직면하면서 독일 경제를 살리기 위해 마셜플랜보다 6배나 많은 7500억유로를 투입했다. 양적 규모에 질적 기대를 품어도 될까. 아니, 질적 기대치를 품어야 하는 건 아닐까? 국가는 이제 수많은 기업에 조용한 주주로 참여해야 할까, 아니면 여기저기 목소리를 높이며 적극 관여해야 할까?
미국의 저명한 싱크탱크 세계자원연구소(World Resources Institute)의 헬렌 몬트퍼드가 답을 들려주었다. 몬트퍼드는 블로그에 올린 글에 코로나19 위기 극복을 고민하는 정부와 기업에 두 가지 옵션밖에 없다고 못 박았다. 수십 년 동안 지속해온 비효율적이고 지저분하며 지속가능하지 않은 석탄 집중적인 옛 개발 모델을 연장하든가, 신속한 전환의 기회를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환경운동가들은 각국 정부가 후자를 선택하기 고대한다. 하지만 다른 문제도 쌓여 있다. 코로나19가 착륙한 세상은 지금 보이는 것처럼 ‘노멀’하지도 좋은 상태에 있지도 않았다. 코로나19는 이미 오래전부터 위기 상태였던 세상에 착륙했다. 수많은 위기에 시달리고 있던 세상에 말이다. 벌써 잊었는가? 법치주의에 기반을 둔 민주주의국가들은 코로나19 이전에 국제적 포퓰리스트와 국내 극단주의자 등 내·외부 적에게 공격받고 있었다.
수많은 세계기구를 설립한 전후 다자주의 질서는 백악관의 주인이 의도적으로 파괴하거나, 혹은 패권국가의 무관심으로 파괴되기도 했다. 국제사회는 시리아, 아프가니스탄, 예멘, 말리, 베네수엘라에서 벌어진 전쟁과 위기를 무기력하게 바라만 보았다. 모든 대륙에서, 특히 아프리카와 유럽 사이에서 도피·추방·피난으로 빚어진 비극은 끊이지 않고 있다. 자본주의적 경제활동과 소비활동은 쇠퇴 단계에 접어든 것처럼 보였다.
인터넷과 플랫폼은 정치·사회와 가족 단위에까지 전복적인 영향력을 펼쳤다. 이렇게 본다면 코로나19 대유행 이전 시기로 되돌아가기를 원치 않아야 할 이유가 적지 않다. 이미 어지럽고 혼란스러운 세상에 코로나19가 착륙했다. 그래서 이 불편한 마음을 굳이 밀어내지 않는 것도 좋을 듯하다. “앞으로도 이렇게 계속!”이라고 말하는 게 불가능할 정도로 지금 위기가 대대적인 변화를 불러오는 것도 방법이다. 더 이상 이렇게 안 된다는 새로운 시야가 열리는 것이다.

ⓒ Der Spiegel 2020년 17호
Am Anfang war das Virus
번역 김태영 위원

울리히 피히트너 economyinsigh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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