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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최초 흑인 은행가와 월가의 마녀

기사승인 [125호] 2020.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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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EOPLE] 경제를 바꾼 세기의 여성 ①

크리스티앙 샤바뇌 Christian Chavagneux <알테르나티브 에코노미크> 기자

   
▲ 매기 워커 초상화. 미국 국립역사기념물 누리집

매기 레나 드레이퍼 미첼 워커
Maggie Lena Draper Mitchell Walker

“우리 돈을 모으자, 쓰자. 우리 돈을 우리에게 이롭게 쓰자. 동전을 지폐로 바꾸는 은행을 만들자!” 1901년 매기 워커가 ‘세인트루크 독립명령’(IOSL) 회원들 앞에서 이렇게 외칠 때, 훗날 자신이 은행을 세우는 첫 여성이 되리라는 사실은 꿈에도 몰랐다. IOSL은 버지니아주 리치먼드에 있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협동조직이었다. 당시 그런 여성이 나온다는 데 내기를 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여성이 흑인이라면 더욱.
매기는 노예의 딸이자 손녀였다. 엄마 엘리자베스 드레이퍼는 14살에 임신한 몸으로 윌리엄 미첼과 1868년 결혼했다. 윌리엄은 결혼하고 몇 년 뒤 숨진 채 발견됐다. 사망 원인은 알려지지 않았다. 엘리자베스는 백인을 상대로 빨래와 다림질을 하며 생계를 이었다. 깨끗한 빨래를 집으로 가져다주는 일은 매기가 했다. 시간이 흘러 매기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입에 은수저를 물고 태어나지 않았다. 머리에 빨래통을 이고 태어났다.”

인권운동가
매기는 암스테드 워커와 결혼하지 않았다면 선생님이 되려고 했다. 15살 많은 석공이었던 암스테드는 태어날 두 아이의 육아와 살림에 필요한 만큼 돈을 벌어왔다. 매기는 꿈을 접어야 했다. 버지니아주에서 기혼 여성은 교사 일을 할 수 없었다. 대신 매기는 흑인 협동조직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IOSL도 그 하나였다.
한 계단 한 계단 밟아 올라 1899년 IOSL 최고위원 자리까지 올랐다. 회원 수는 적고 재정은 바싹 말라 조직이 위태위태했다. 매기에겐 좋은 생각이 있었다. 1902년 신문 <세인트루크 헤럴드>를 만들어 운영하면서 조직을 알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앞선 1901년부터 생각해둔 계획이 있었다. 바로 은행을 세우는 것이었다.

흑인 여성을 위한 은행
인권운동을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 알았다. 백인 은행은 유색인종, 특히 흑인 여성을 반기지 않았다. 흑인 여성이 대출받기는 불가능했다. 사업에 쓸 돈, 아니면 그저 먹고사는 데 돈이 필요해도 빌릴 데가 전혀 없었다. 부조리했다.
매기는 은행 설립 행정 절차를 알아보고 경영과 회계 개인교습을 받았다. 리치먼드에 있는 머천츠내셔널뱅크 사무실에서 매주 몇 시간씩 보냈다. 백인 은행장은 흑인 인권에 관심이 많았다. 매기는 1903년 7월 은행장 승인을 받아 세인트루크 페니세이빙뱅크를 설립했다. 초기 자본금은 IOSL가 마련하고, 은행 계좌를 만들러 온 이들에게 은행 주식 매입을 권유했다. 문을 연 첫날 300명이 방문했다. 예금액은 31센트부터 100달러까지 다양했다.
매기는 20세기 초 미국에서 흑인 여성도 은행장, 성실 거래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 했다. 경영자 매기는 훌륭했다. 감사위원회의 흑인 여성 지도부는 일일 은행거래를 관리하고, 재정위원회는 대출 허가 여부를 결정하는 핵심 구실을 했다. 전국 지점에서도 일하는 흑인 여성이 많았다. 아주 드문 일이었다. 다른 은행처럼 여성 전용 창구를 두지 않은 것도 이례적이었다. 여성도 동등하게 은행 일을 볼 수 있었다. 혁명이었다.
매기는 노동자계급 흑인 여성에게 소액을 대출해주었다. 대출금은 소득에 보탬이 돼 고리대 갈취에서 벗어나게 해주었다. 매기는 사업을 시작하거나 키우려는 여성에게 큰돈을 빌려주었다. 대출 허가 기준은 보통 은행과 다르지 않았다. 거래 희망자의 소득수준을 봤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재정위원회는 거래 희망자가 사회에서 어떤 평판을 받는지도 알아봤다. 성실한지, 책임감과 직업 윤리의식이 있는지, 협동조직 활동을 활발히 하는지 등을 따졌다. 일은 순조로웠다. 불량 거래자가 거의 없었다. 불량 거래자에게는 사회·정신적 압박을 가해 이자와 원금을 받아냈다. 흑인 공동체에 가장 큰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경찰, 사법기관보다 더했다.

인종차별과 경제위기
백인은 흑인 여성 은행의 성공을 고운 시선으로 바라볼 리 없었다. 당시 버지니아주는 흑인 유권자 수를 줄이려 선거법을 바꾸고, 전철에서 인종을 분리하고 있었다. 백인 상인은 흑인이 하는 장사에 훼방을 놓았다. 1910년 버지니아주는 은행 감사법을 강화했다. 잘된 일이었다. 부실 금융기관이 많았다.
백인 은행 절반이 최종 감사를 받는 동안, 모두 14곳의 흑인 은행 가운데 어느 한 곳에서도 문제가 발견되지 않았다. 전체 자산 1%를 겨우 차지하던 흑인 은행이었다. 여러 은행이 문을 닫아야 했지만, 매기의 은행은 무사했다. 매기는 빈틈없는 경영자였다. 조금 권위적인 것만 빼면 완벽했다. 1930년 세계대공황 때 그의 능력을 여실히 보여줬다. 1929~31년 매기는 세인트루크 페니세이빙뱅크를 다른 두 은행과 합병하며 강화했다. 합병 뒤에도 최고경영자로 남아 대공황을 끄떡없이 이겨냈다.
그러나 일 부담이 점차 늘었다. 당뇨와 오래전부터 안 좋던 무릎 때문에 말년을 휠체어에서 보내야 했다. 남편 생각이 자주 났다. 아버지를 강도로 착각한 아들이 쏜 총에 남편을 먼저 보냈다.
매기는 자신을 대견하게 여길 만했다. IOSL 회원 수는 폭발적으로 늘었다. 은행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유지될 것이었다. 매기가 세상을 떠난 1934년 12월15일, 많은 것이 변해 있었다. 저금한 동전은 대출금 지폐로 바뀌어 있었다. 흑인 여성 수백 명이 돈과 함께 자신감을 얻었다. 성별과 인종으로 차별받던 사회에서 저마다 제자리를 찾을 수 있었다.

   
▲ 1909년에 찍은 헤티 그린 사진. 미국 국립역사기념물 누리집

헤티 그린
Hetty Green

세계적 고전 문학작품 <모비 딕>을 쓴 허먼 모빌은 1841년 미국 동부 뉴베드퍼드 항구에서 고래잡이배를 탔다. 이곳에서 모빌은 에드워드 로빈슨을 만났을지도 모른다. 에드워드는 귀한 고래기름을 팔러 다니던 부자 사업가였다. 하지만 모빌은 에드워드의 딸, 헤티는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아들을 원했던 아버지에게 외면받은 헤티는 할아버지와 숙모 손에서 자랐다.

자수성가
헤티는 퀘이커교 집안에서 엄격한 교육을 받았다. 시력이 감퇴하는 할아버지에게 글을 읽어준 덕에 주식과 무역 이론을 일찍 접했다.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아버지와 가까워지려 노력했다. 일 나가는 아버지를 매일 따라다니면서 사업을 배웠다. 헤티는 돈을 밝히는 아버지를 점점 닮아갔다.
헤티 눈에 돈은 최고의 성공 가치였다. 뉴욕에서 열리는 사교행사 ‘발 데 데뷔탕트’에 가는 경비로 아버지에게 1200유로를 받았다. 돌아올 때 돈은 훨씬 불어 있었다. 드레스 사는 데 쓴 200달러를 빼고 나머지 돈으로 주식을 샀다. 짭짤한 수익을 거뒀다. 헤티가 돈에 집착하는 이유를 여기서 찾는 사람도 있다. 아들 못지않은 경제력을 아버지에게 증명해 보이고 총애를 얻으려 했다는 것이다.
1860년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헤티는 비탄에 빠졌다. 어머니 유산을 아버지가 모조리 상속했기 때문이다. 유산 문제는 헤티의 삶에서 큰 자리를 차지했다. 상속 싸움으로 여러 번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다. 그사이 헤티는 백만장자 에드 그린을 만났다. 헤티 아버지는 딸이 부자를 만났다는 이유로 딸에게 현금 100만달러만 유산으로 남겼다. 500만달러에 대해선 용익권(돈을 소유하지는 못하고 얼마 동안 써서 이익을 낼 수 있는 권리)만 주었다. 또 배신이었다. 그래도 큰돈은 큰돈이었다.
그녀는 1867년 33살에 결혼해 헤티 그린이 되었다. 그린 부부는 영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남편은 은행원, 아내는 투자가가 됐다. 헤티는 미국에 많이 투자했다. 국채를 비롯해 새로 생긴 철도산업이 주요 투자 대상이었다. 일단 투자 목록을 짜고 나면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끝장을 보았다. 투기꾼 헤티의 긴 삶은 이제 막 시작이었다.
헤티는 남다른 투자 원칙 세 가지가 있었다. 채권·부동산·토지 등은 매도자 상황이 어려울 때를 노려 싼값에 살 것, 돈이 되면 소송을 피하지 말 것, 감정에 매몰되지 않을 것이었다.

낡은 외투의 갑부
헤티는 미국에서 가장 부유한 여성이었다. 낡고 해진 검은 원피스와 외투 차림으로 대중교통을 이용했다. (다른 이유도 있겠지만) 지방세를 내지 않으려 자주 이사를 했다. “동전을 아끼면 지폐가 지폐를 부른다”고 말하던 구두쇠였다. 반려견을 향한 사랑이 어디서 오느냐고 묻는 기자에게 “내 개는 내가 얼마나 부자인지 모른다”고 답할 정도였다. 언론은 헤티를 ‘월가의 마녀’라고 불렀다.
분명 헤티는 전설 속 모습보다는 더 베풀 줄 아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죽기 전까지 남편을 도와줬다. 헤티는 여성에게 꼭 투표권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보다 돈을 벌고 쓰는 법을 아는 게 더 중요하다고 여겼다. 그가 자주 하던 말이 있다. “남성이 하는 일은 여성도 할 수 있다!”

   
▲ 프랑시스 지로 감독의 영화 <더 레이디 뱅커> 프랑스판 포스터.

마르트 마리 아노
Marthe Marie Hanau

마르트는 그야말로 인물이었다. 그의 이야기는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로미 슈나이더가 출연한 프랑시스 지로 감독의 영화 <더 레이디 뱅커>다. 평범한 프랑스 상인 집안 출신 마르트는 일찍이 독립적인 여성의 모습을 보였다. 공공장소에서 담배를 피우고, 차를 몰고 다녔다. 코르셋을 거부하고, 동성애 성향을 숨기지 않았다.

투기꾼 언론인
자기 몫은 자기가 벌어야 하는 법. 마르트는 투기 분위기로 들뜬 1920년대에 작은 사업 몇 번으로 돈맛을 조금 봤다. 마초적인 금융 세계에 흥미로운 일거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기업에 기업가치를 ‘활성화하라’고 조언하며 시장에 뛰어들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노이즈(입소문) 마케팅으로 주가를 올리는 전략이었다. 마르트는 장외시장에서 활동했다. 상장 가치가 충분하지 않지만 투자 가치는 높은 주식이 거래되는 시장이었다. 주식시장에 본격 진출하려고 보니 성별 문제가 걸렸다(당시 여성에게는 주식거래가 금지됐다). 마르트는 남장하고 활동했다.
1925년 3월 주간지 <가제트 뒤 프랑>을 창간했다. 여기에 금융 조언과 함께 프랑(프랑스 화폐) 환율 안정화 정책을 지지하는 기사를 실었다. 구독료는 일종의 출자금이었다. 구독자가 낸 돈으로 마르트가 투자해 수익금을 나눠주는 식이었다. 신문은 정치와 금융이 만나는 중심에 자리했다. 그런 신문 덕에 마리트는 쉽게 정보를 모으고, 또 정보를 모으는 데 쓸 뇌물을 벌 수 있었다. 은행은 거래자 몰래 뒷돈 챙기는 기관이라고 비판하면서, 대중에게 투기 시장을 홍보했다.
투기 시장은 가격을 조작할수록 더 빠르게 성장했다. 마르트가 신문에서 어디 주를 사라고 하면 그 주가는 곧장 올랐다. 마르트 측근은 남보다 빨리 정보를 얻어 더 많은 수익을 냈다. 하지만 마르트의 투자 장부는 거의 텅 비어 있었다. 마르트가 추천하는 회사 가운데는 그가 만든 유령회사도 섞여 있었다.

주가 조작
마르트는 1928년 12월 공중회계법에 발목이 잡혀 체포됐다. 이후 자유를 얻지 못했다. 1930년 3월 단식투쟁을 하다 코생병원에 입원당해 강제급식을 받았다. 병원에서 도망치려다 다시 수감됐다. 3월29일 가석방된 마르트는 다시 신문을 발간했다. 1930년 10월 재판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항소했다.
항소재판 전 강연에서 돌아오는 길에 사고로 두 다리가 부러졌고, 후유증으로 한쪽 다리를 못 쓰게 됐다. 1934년 7월 항소재판에선 형이 1년 늘었다. 1935년 2월20일 상고까지 기각된 마르트는 구급차에 실려 남은 징역살이를 해야 했다. 조금만 버티면 7월30일 석방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호화로운 호텔 생활과 광란의 카지노 파티는 끝나고 없었다. 그는 7월14일 진정제 한 통을 삼키고 정신을 잃은 채 발견됐다. 7월19일 세상을 떠났다.

ⓒ Alternatives Economiques 2020년 7월호(제403호)
Ces femmes qui ont transformé l’économie et ont été oubliées
번역 최혜민 위원

크리스티앙 샤바뇌 economyinsight@hani.co.kr

<저작권자 © 이코노미인사이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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