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OVER STORY] 신용위기 끝인가 시작인가- ③ 실리콘밸리은행 파산
주거래은행의 파산은 실리콘밸리 창업계와 그들의 자아상을 뒤흔들어놓았다. 그 충격파는 독일 스타트업까지 도달했다.
알렉산더 뎀링 Alexander Demling
안톤 라이너 Anton Rainer <슈피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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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리콘밸리은행 파산은 이 은행 계좌를 갖고 있던 독일 스타트업계에도 큰 충격이었다. 소프트웨어 회사 코드스페어(Codesphere)를 운영하는 엘리아스 그롤은 수백만달러를 독일로 다시 송금해야 했다. 유튜브 갈무리 |
실리콘밸리에서 사라진 기업을 애도하는 일은 드물다. 첨단기술 업계의 ‘전부 아니면 전무’(all-or-nothing) 문화에서 회사가 도산하는 것은 일상의 일부다. 북부 캘리포니아(실리콘밸리)의 상습적 낙관론자들은 과거에 연연하지 않는다.
그러나 실리콘밸리은행(SVB)은 이야기가 다르다. 마이클 모리츠는 영국 경제일간 <파이낸셜타임스>에 기고한 글에서 마치 사랑하는 할머니가 돌아가시기라도 한 것처럼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무시할 때 SVB는 우리를 위해 거기 있었다”고 썼다.
모리츠는 실리콘밸리의 원로다. 영국 웨일스 출신인 그는 수년 동안 기술 투자기관 중 최고로 손꼽히는 세쿼이아캐피털(Sequoia Capital)에서 성공적인 투자자로 활동했다. 그는 구글, 유튜브 그리고 일론 머스크의 페이팔(Paypal) 전신인 엑스닷컴(X.com)에 초기부터 투자했다.
모리츠에 따르면 SVB는 기술업계에서 “직원들이 모든 고객의 이름을 아는 사랑받는 동네 가게” 같았다. 오랫동안 젊고 성급한 스타트업 창업자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던 시중 대형 은행과는 달랐다. 하지만 SVB는 불과 며칠 사이에 무너져버렸다.
동네 가게 같았던 SVB
SVB 파산은 우울한 기술업계의 분위기를 더욱 어둡게 했다. 이 은행의 붕괴는 기술업계의 위기를 반영한다. SVB가 날려버린 수십억달러는 대부분 호황기의 넉넉했던 ‘파이낸싱 라운드’(투자 유치 행사)에서 나왔다. 연준의 급격한 금리인상으로 SVB는 치명타를 입었고, 많은 기업의 주가도 바닥을 모르고 추락하고 있다. 수년 동안 글로벌 경쟁을 주도하던 ‘기술의 계곡’(실리콘밸리)은 글로벌 은행 위기의 ‘그라운드제로’(시작 지점)가 됐다.
실리콘밸리에서 SVB는 독일로 치자면 지방 소도시의 저축은행(Sparkasse) 같았다. SVB는 벤처캐피털 펀드와 와이너리에 투자하고, 여성 프로사이클링팀을 후원하며, 실제로는 담보가 될 수 없는 창업자들의 스타트업 주식을 담보로 대출해줬다. 덕분에 일부 회사는 단 1센트의 수익을 내기도 전에 비싼 샌프란시스코에 집을 장만할 수 있었다. 큰 위험을 감수하는 것에 대한 보상으로 SVB는 고객에게 개인·기업 거래 대부분을 SVB로 하도록 요구했다.
이는 2023년 3월10일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뱅크런(대규모 예금인출)으로 SVB가 파산했을 때 많은 이에게 재앙으로 돌아왔다. 기업가 알렉산더 토레네그라는 트위터에 3월9일 목요일 오전 9시께 200명 이상의 기업가 회원이 모인 와츠앱 단체대화방에서 나온 SVB의 지급 능력에 대한 소문이 어떤 식으로 뱅크런을 촉발했는지 설명하는 글을 올렸다.
콜롬비아 태생인 그는 이런 일에 민감하다. 그의 고국에선 친구들의 부모가 뱅크런으로 모든 것을 잃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깨닫자마자 토레네그라는 급히 아내와 직원들에게 모든 SVB 계좌에 예치된 돈을 빼내라고 재촉했다. 어느 직원은 곧바로 집에 돌아가 돈을 인출하기 위해 치과 시술을 중단하기까지 했다.
이른 오후에 전해진 소식이 결국 모든 댐을 무너뜨렸다. 독일 출신의 페이스북 투자자 피터 틸의 벤처캐피털 회사인 파운더스펀드(Founders Fund)가 자사의 포트폴리오에 속한 기업들에 모든 SVB 계좌의 자금을 인출하라고 권고한 것이다. 미국 연방예금보험공사(FDIC)가 SVB를 법정관리로 전환하기 전까지 그날 하루 동안 SVB에서 420억달러가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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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매사추세츠주 웰즐리의 실리콘밸리은행 지점에서 2023년 3월13일 고객들이 돈을 인출하기 위해 길게 줄 서 있다. REUTERS |
독일까지 번진 SVB 충격
빠르게 대처하지 못한 사람들은 이제 재정적 생존을 위해 싸우고 있다. 심지어 SVB 고객이 아니었던 회사들도 갑자기 부도 위기에 처했다. 기업 인사 부서에서 널리 사용하는 소프트웨어 제공업체인 리플링(Rippling)은 고객사 직원의 급여 지급을 은행을 통해 처리한다. 캘리포니아주에서는 사업주가 직원에게 급여를 지급하지 않으면 개인적으로 법적 책임을 져야 한다.
SVB 충격파는 실리콘밸리를 넘어 독일의 카를스루에까지 미쳤다. 엘리아스 그롤은 수백만달러를 잃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약혼녀와 함께 소파에 앉아 있었다. 수개월에 걸친 펀드레이징(자금조달 활동) 뒤 소프트웨어 회사 코드스페어(Codesphere)의 이 최고경영자(CEO)는 다소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투자자 중 한 명이 휴대전화로 SVB 주가가 53.8% 하락한 스크린샷을 보냈다. 그롤은 “우리도 거기에 계좌가 있다”고 투자자에게 말하며 “다른 곳으로 이체해야 할 것 같냐”고 물었다. 몇 분 만에 이 25살 청년 기업가는 수백만달러를 독일로 다시 송금했다.
이 사건은 많은 독일 스타트업에도 충격적인 경험이었다. 하지만 누구도 이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SVB 파산에도 유동성 부족 사태는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고 간략한 성명을 밝힌 에어택시 회사 릴리움(Lilium)도 원치 않고, “현재 담당자를 연결해드릴 수 없다”는 밀키트 판매업체 헬로프레시(HelloFresh)도 마찬가지다. 여행 스타트업 겟유어가이드(GetYourGuide)는 그나마 서면으로 자체 리스크 관리 덕분에 모든 자금을 조기에 인출했다고 해명했다. “따라서 겟유어가이드는 폐쇄 당시 SVB에 더 이상 자금을 넣어두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정말 모든 것이 괜찮은가?
현재 상황에 관해 이야기하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 마티아스 틸만(39)이다. 그는 트리바고(Trivago)의 최고재무책임자(CFO)다. 독일 뒤셀도르프에 본사를 둔 이 여행사는 SVB 영국 법인에 예치해둔 수백만달러를 독일로 신속하게 송금할 수 없었다. “우리 예금은 해지 기간이 더 길기 때문에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고 틸만은 말했다.
3월10일 금요일 SVB 파산 뒤 그는 주말 동안 임시 발표 초안을 작성했지만 그것을 다시 서랍 속에 넣어두었다. 회사가 실제 위험에 처한 적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행사가 보유한 자금 3억유로 중 ‘10% 미만’이 SVB에 예치돼 있었다. 2009년 금융위기 때 도이체방크에서 근무했던 틸만이 배운 예방조치다.
크리스티안 밀레도 “우리는 모두 다행히 큰 피해 없이 이번 사태를 넘겼다”고 말했다. 독일 스타트업협회 회장인 그는 공황상태에 빠지기 직전인 창업자들과 투자자들의 걱정스러운 와츠앱 메시지를 수천 통이나 받아야 했다. 벤처캐피털 펀드 헤드라인(Headline)의 투자자인 그는 동시에 자사도 걱정해야 했다.
그는 “첫 조치는 SVB에 우리 자금이 예치됐는지 확인하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많지 않은 자금이 예치됐고 “모든 것이 안전 범위 내였다”고 한다. 그다음 밀레는 자신의 포트폴리오에 있는 세 스타트업에 연락해 그들의 계좌에 우려를 표했다. 그는 “우선 사람들을 진정시키려 노력했다”고 말했다. 다른 조처를 하기에는 너무 늦은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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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뉴욕 경찰이 2023년 3월12일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실리콘밸리은행 파크애비뉴 지점에서 대기하고 있다. REUTERS |
균열된 커뮤니티
밀레는 SVB 사례를 미디어와 스타트업 업계의 인플루언서들이 만들어낸 자기충족적 예언이라고 본다. 이는 2008년 미국 투자은행 리먼브러더스 파산과 다른 점이기도 하다. 밀레는 “모두가 목이 잘린 닭처럼 뛰어다니는 바람에 창업자들은 스스로 무덤을 파고 말았다”고 짚었다.
사건 발생 직후 미국에서는 선견지명을 보여주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무엇보다 실리콘밸리의 유명한 투자회사들이 모여 있는 팰로앨토의 거리, 샌드힐로드의 벤처투자가들이 그러했다. 그들은 경험이 부족한 창업자들을 흔들림 없는 손길로 이끌어 난관에서 빠져나오게 인도해주는 현명한 멘토로 여겨지지 않았는가? 평소 칵테일 리셉션에서 수백만달러 규모의 거래를 성사시키던 네트워커들이 SVB에 닥친 폭풍우를 피하기 위해 일치된 조치를 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
SVB 사건은 실리콘밸리의 친목 문화에 생긴 균열을 잔인하게 드러냈다. 은행 위기는 커뮤니티를 ‘마이클 모리츠’팀과 ‘피터 틸’팀으로 나눴다. 모리츠의 회사인 세쿼이아는 SVB 은행 파산 하루 뒤인 3월11일 토요일에 100개 이상의 다른 회사들과 함께 새로운 소유권자 아래 SVB와 계속 거래할 것을 약속하는 호소문을 발표했다.
여기에 이름이 빠진 회사가 하나 있었다. 뱅크런으로 위기를 악화시킨 틸의 회사 파운더스펀드다. 어차피 모리츠는 과거에 그가 후원하던 머스크를 페이팔의 최고경영자 자리에서 끌어내린 틸을 개인적으로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모리츠는 자신의 전기 작가에게 틸을 “속마음은 헤지펀드맨”이라고 비방했다. 즉 냉정한 기회주의자라는 것이다.
파운더스펀드는 미묘한 순간에 업계 은행 SVB를 절벽 아래로 밀어버렸다는 비난에 스스로를 변호한다. 파운더스펀드가 포트폴리오 회사에 자금 인출을 권고했을 때 “뱅크런이 진행 중이라는 사실이 명확했다. 우리는 수탁자 의무에 따라 대응했다”고 최고재무책임자 닐 루스벤은 뉴스 포털 <액시오스>(Axios)에 말했다.
그럼에도 일부에서는 여전히 틸이 의도적으로 위기를 부채질했다고 의심한다. 틸이 개인적으로 투자한 금융서비스 업체 브렉스(Brex)는 SVB 붕괴로 큰 이득을 본 수혜자 중 하나다. 고객이 SVB에서 인출한 수십억달러 중 일부는 신규 브렉스 계좌에 입금됐다. 브렉스의 엔히케 두부그라스 최고경영자는 SVB 파산 이후 3천여 건의 신규 계좌 개설 신청서가 접수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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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부에선 실리콘밸리의 큰손인 피터 틸이 자신이 투자한 금융서비스 업체의 이익을 위해 의도적으로 실리콘밸리은행의 위기를 부채질했다고 의심한다. 2016년 10월31일 미국 워싱턴 내셔널클럽에서 연설하는 틸의 모습. |
대출계약 위반
그러나 두부그라스는 <슈피겔> 인터뷰에서 위기에서 이득을 본 자라는 비난을 일축했다. SVB 몰락은 “오히려 우리에게 나쁜 일”이었다고 그는 말했다. 이제 많은 스타트업이 안전한 대형 은행을 찾으면서 그의 회사 같은 소규모 기업을 외면할 수도 있다. “돈을 잃을까봐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스타트업 금융기업에 맡기지 않을 것이다.”
SVB 파산이 장기적으로 기술산업에 얼마나 큰 피해를 줄지는 앞으로 몇 달 동안 드러날 것이다. 다만 확실한 점은 SVB가 다른 금융기관은 거의 손대지 않는 거래에 관여했다는 것이다. 손실이 잦은 성장기업에 대규모 대출을 해주는 유일한 은행이었다. 그러나 미래 채권자(은행)의 상황이 명확하지 않으면 채무자(기업) 역시 당분간 허공에 매달려 있게 된다. 예를 들어 샌프란시스코의 온라인 패션 컨설턴트인 스티치픽스(Stitch Fix)는 SVB에서 하룻밤 사이에 4천만달러의 신용 한도를 잃었다.
무엇보다 이 은행의 이전 고객 중 상당수가 잔고를 급하게 인출하면서 대출계약 조항을 위반했을 수도 있다. SVB의 새로운 소유자(SVB를 인수한 미국의 중소은행 퍼스트시티즌스)가 대출금을 회수할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창업자와 그들의 회사가 또다시 혼란에 빠지게 된다.
ⓒ Der Spiegel 2023년 제12호
Silicon Valley Bang
번역 황수경 위원
알렉산더 뎀링 economyinsight@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