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ISSUE] 기후운동은 부유층의 특권?
환경과 복지는 보완적 관계에 있다고 정치인들은 주장한다. 하지만 환경과 복지가 항상 조화를 이루는 것은 아니다.
안나 마이어 Anna Mayr <차이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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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르스 클링바일 사회민주당 대표는 최근 독일 공영방송 <도이칠란트풍크>에 나와 ‘기후보호가 부유층만의 전유물이 돼서는 안 된다’고 했다. ‘환경과 복지는 함께 숙고해야 한다’는 주장은 다양하게 변주돼 나오지만 모든 문제의 해결책이 될 수는 없다. REUTERS |
아주 명백해 따로 물어볼 필요조차 없는 문장이 있다.
“사람은 자기 운명의 건축가다.” “돈은 지출하면 더 이상 내 돈이 아니다.” “환경과 복지는 함께 숙고해야 한다.”
이 문장들은 모두 대단한 말처럼 들리지만, 곰곰이 뜯어보면 어딘가 맞지 않는 대목이 있다. 이 기사의 주제는 바로 셋째 문장에 언급된 환경과 복지다. 독일 연방하원에서 건물에너지법이 발의됐고, 기후보호단체 ‘마지막 세대’가 여름휴가를 떠났다. 또한 적잖은 사람이 아동기초수당은 이미 실패했다고 판단하며, 최저임금이 여전히 시간당 12.41유로(약 1만8천원)를 넘지 못한다. 이런 상황에서 환경과 복지야말로 긴급한 사안이 아닐 수 없다.
‘환경과 복지는 함께 숙고해야 한다’는 문장은 다양하게 변주돼 사용된다. 라르스 클링바일 사회민주당(사민당) 대표는 독일 공영방송 <도이칠란트풍크>에 출연해 “기후보호가 부유층만의 전유물이 돼서는 안 된다”고 몇 달 전 언급했다. 난방법처럼 기후보호에도 ‘사회적 충격완화 장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교황은 환경과 복지가 서로 상충관계가 아닌 동전의 양면과 같다고 2015년에 말한 바 있다.
환경운동 연대 ‘미래를 위한 금요일’도 단순히 기후보호나 기후 살리기가 아닌 ‘기후정의’를 외친다. 사회복지단체 카리타스(Caritas·독일 가톨릭교회 사회복지 사업단)는 생산과정에서 탄소배출량이 많은 제품의 가격 인상을 요구하는 동시에, 가격 인상분을 감당할 여력이 없는 사람들을 위한 ‘효율적인 환급 시스템’도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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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경운동단체 ‘미래를 위한 금요일’ 회원들이 2023년 4월21일 독일 베를린에서 시위하고 있다. 기후보호를 넘어 ‘기후정의’도 외치는 이 단체에 대해 부유층 자녀나 참여하는 배부른 투정이라는 비아냥도 있다. REUTERS |
인간의 손실 회피 성향 무시
2021년 독일 총선 전 녹색당과 자유민주당(자민당)은 탄소가격제 도입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닭고기 가격 대비 소고기 가격이 대폭 인상되면서 사람들은 탄소가격제를 피부로 느낀다. 그래서 녹색당과 자민당은 저소득층의 부담을 줄여주기 위해 매달 수백유로 상당의 ‘기후보조금’ 도입도 공약으로 동시에 내걸었다. 저소득층이 주말이나마 육류를 사 먹으려면 기후보조금은 필요하다. 적잖은 사회단체가 기후보조금 도입 요구에 동참했다.
하지만 ‘환경과 복지는 동전의 양면과 같으며 모든 문제의 해결책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이 더는 옳지 않음을 지난 총선에서 2년이 지난 이제는 인정해야 할 것 같다. 사람은 이득보다 손해를 더욱 강력하게 인지하는 습관이 있다. 심리학에서 이를 ‘손실 회피 성향’이라고 한다. 사람들은 길에서 우연히 10유로 지폐를 습득하면 잠시 기뻐하는 것으로 그치지만, 10유로 지폐를 분실하면 반나절 내내 속상해한다.
독일 정부는 가스요금 인상 제한, 일회성 지원금, ‘비과세 인플레이션 조정’(Tax-exempt Inflation Adjustment) 등의 지원금으로 2천억유로(약 291조원)를 투입한 바 있다. 여당인 사민당은 그 대가로 무엇을 얻었을까? 각종 여론조사에서 19%라는 역대 최저의 처참한 지지율이다. 하지만 이는 사민당 정부가 지원안을 충분히 홍보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 때문이다. 인간은 선물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만 가지고 있던 것을 빼앗기면 절대 참지 못한다.
또한 누구도 복지 차원의 보상금 및 환급액 수령자가 되는 것을 반기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이 일해 번 돈으로 의식주를 마련하고 자녀를 키울 수 있기를 원한다. 하지만 독일에서 적잖은 사람이 이런 기본적인 기대조차 실현하기 힘들어졌다. 많은 사람이 일하지만 주거보조비, 양육수당, 심지어 ‘시민수당’에 의존하는 상황이다. 또한 대부분의 사람이 가진 이 소박한 기대는 기후보호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노동자의 권리와 최저임금, 임금협약이 탄소배출량을 늘리거나 줄여주지 않는다.
독일에서 최근 몇 년 동안 기후운동가, 기후시위가, 녹색당 정치인 등 기후보호에 동조하는 사람들은 ‘반사회적’이라는 비난에 지속적으로 시달렸다. 비건 식습관이나 기차 이용은 부유층의 전유물이고, ‘미래를 위한 금요일’의 시위는 부유층 자녀나 참여하는 배부른 투정이라는 것이다.
기후운동이 부유층의 특권이라는 비난은 기후보호라는 대명제에 흠집을 낼 수 있다. 빈곤층도 형편만 허락했다면 퀴노아(남아메리카 안데스산맥의 고원에서 자라는 곡물로 슈퍼푸드로 알려짐)를 더 먹고 싶지 않겠는가? 자동차는 재택근무를 할 수 없는 사람들이 감수해야 하는 스트레스 문화의 상징과 같지 않을까? 어차피 기후전환 등 모든 전환은 정보를 취득하고 이에 맞는 활동을 하기에 필요한 시간과 자원을 가진 부유층에서 시작하지 않는가? 부유층과 달리 서민들에게는 시간과 자원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자동차와 스마트폰을 제일 먼저 소유한 계층이나, 현재 기후보호에 도움이 된다는 열펌프와 전기자동차를 가장 먼저 소유한 것도 부유층이다. 그래서 어떻다는 말인가? 열펌프와 태양광설비는 원래 스마트폰과 식기세척기처럼 비정치적인 혁신적 발명품이었다. 스마트폰과 식기세척기는 세상과 일상을 변화시켰고, 일상을 더 편하고 효율적으로 만들어줬다. 초기에 스마트폰과 식기세척기는 상당한 일시 지출을 감당할 여유가 있는 사람들만 구매할 수 있었다. 이제는 스마트폰도 100유로 아래로 구입 가능하다. 우리가 사고하고 정보를 취득하며 주위 사람들과 대화하는 방식 등 모든 것이 달라졌지만, 우리는 이를 전혀 부담으로 느끼지 않는다. 물론 기후위기가 쉽게 극복되지 않는 점은 분명하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거주하고, 다른 방식으로 먹어야 하고, 다른 방식으로 이동해야 한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이라고 해서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기후운동은 어떤 기존 방식도 제대로 해체하지 못했고, 오히려 빈곤층 참여 유도에 실패하면서 이상한 방식으로 선회했다. 이후 기후운동은 누구의 기분도 상하게 하지 않고, 또 누구도 소외시키지 않기 위해 클리셰(상투적 표현)로 일관했다. 예를 들어 기후운동 관계자들은 ‘기후보호 운동의 사회적 수용을 위한 홍보’에 몰두했고 줄곧 ‘사람들과 함께 가야 한다’고 내세웠다. 기후운동 관계자들은 기후위기 및 기후위기와의 전쟁을 제대로 홍보하면 ‘사람들을 움직일 수 있다’고 확신하는 것으로 보였다. 이런 맥락에서 독일 개신교 사회복지기관은 복지협회, 기후보호협회들과 공동으로 발표한 성명문에 “기후보호와 복지는 따로 떼어놓고 볼 수 없다”고 밝혔다.
이는 당연히 거짓말이다. 기후보호와 복지는 따로 떼어놓고 볼 수 있다. 아무리 공정한 사회라 할지라도 탄소배출량이 엄청날 수 있다. 또한 반대로 기후중립적 사회가 신자유주의적일 수도 있다. 신자유주의 자체가 사회를 바로 망가뜨리는 것도 아니며, 복지정책 자체가 공기를 깨끗하게 만들어주지도 않는다. 자본가는 소비자의 ‘구매력’이 유지되는 세계를 원한다.
자본이 없는 저소득층이 다른 계층에 비해 탄소배출량이 제일 적기는 하다. 하지만 이는 저소득층이 더 훌륭한 사람들이어서가 아니라 소비 여력이 없기 때문이지 않을까? 누구라도 경제력이 뒷받침된다면 요트 한 대씩은 소유하게 되지 않을까?
빈곤층이 부유층보다 지구온난화로 더 심각한 영향을 받는다는 게 기후운동 관계자들의 입장이다. 가난한 사람은 기후변화에 대응할 자원이 적은 가난한 국가에 사는 경우가 많으므로, 전 지구적으로 본다면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이 말이 중부유럽과 이른바 서구 전체에도 과연 들어맞을까?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는 고급 빌라들이 대형 산불에 불타고, 독일 라인강 인근 아르계곡에서는 부유층 저택도 홍수에 떠내려가거나 침수 뒤 곰팡이가 피었다. 대도시의 럭셔리 펜트하우스는 더운 여름이면 거주가 불가능해지고, 물 부족으로 식수가 배급되는 프랑스 남부에서 자택 수영장에 물로 채울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돈만 있으면 집과 토지 그리고 에어컨을 살 수 있다. 하지만 부유층이 기후위기로부터 전혀 타격을 받지 않거나 자신을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다는 것은 오해다.
이 오해로 기후위기는 선한 의도를 가진 사람들만의 주제가 돼버렸다. 소말리아 빈곤층 슬럼가를 생각하며 육류를 먹지 않는다고? 독일 켐니츠 헬베르스도르프 지역에 거주하는 편모를 위해 자전거를 타고 다닌다고? 제발 그러지 말자! 전세계 기후보호를 위해 특정 샴푸를 쓸 필요도, 버켄스탁 샌들을 신을 필요도 없다. 기후보호를 위해서라면 굳이 더 공정한 사회라는 목표를 가질 필요가 없다.
이제는 기후전환이 사회적 전환이 될 것이라는 말도 심심치 않게 들린다. 하지만 각자 집 안을 살펴보면, 가족 세 명이 거주하는 50㎡ 크기의 집에 기후위기 주범으로 꼽힌 강화마루에 가스보일러까지 있다. 지금까지 강화마루와 가스보일러는 사람들의 관심 밖이었다.
법규정으로 공정하게 예산을 분배하는 것이 정말 쉬운 일이었다면 오래전에 이뤄졌을 것이다. 이제는 중소 도시에서의 임대료도 평균치 소득자들에게 감당하기 힘든 수준으로 치솟았다. 대부분의 시골 지역에서는 버스가 한 시간에 한 대, 혹은 아예 운행하지 않는다. 모두에게 좋은 삶의 여건을 조성하는 것은 너무나도 복잡다단한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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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후위기의 최대 피해자는 남반구 국가들이지만, 사막화라는 무시무시한 시나리오로 복지의 가치를 폄훼해서는 안 된다. 2022년 5월26일 소말리아에 닥친 심각한 가뭄으로 가축들이 죽어 있다. REUTERS |
사회안전망 필요
빈곤층은 삶의 질 개선 약속에 기후보호라는 ‘조건’이 붙는다면 약속을 불신할 것이다. 기후전환에서 ‘복지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실은 복지가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다. 지역의 수영장 운영은 복지 사안이다. 수영장 물을 태양전지판으로 온수로 만드는 것은 환경의 영역이다. 반면 태양전지판으로 온수로 만드는 수영장만 운영하라고 지시하는 것은 횡포에 가깝다.
이런 식으로 다양한 기후전환 공약을 깨알 같은 입법 과정으로 분해할 수 있다. 기후중립적 철강공장의 준공은 환경과 산업정책을 모두 아우른다. 그런데 기존 공장의 전체 직원을 그대로 인수하는 문제는 노동자 권리와 복지 사안이다. 누구에게나 항시 사회안전망이 필요하다. 기후위기가 이런 사실을 바꾸지는 않는다.
스베냐 슐체 독일 경제협력개발부 장관은 “기후위기와의 전쟁이 현시대의 핵심적 사회문제”라고 2022년 말한 바 있다. 슐체 장관이 가리킨 기후위기의 최대 피해자는 유럽이나 독일의 약자들이 아니라, 지구 온도가 2도 상승하면 특히 물이 부족해지고 사막화가 진행될 남반구 국가들이었다. 그 나라들에서는 경작이 불가능해지고 수많은 사람이 아사할 것이다.
이런 무시무시한 기후위기 시나리오에 비하면 ‘복지’는 사소한 문제로 보인다. 이것이 기후 담론이 작동하는 방식이다. 독일의 연금생활자가 열펌프 장만에 상당한 지출을 감수해야 하거나 사헬지역(아프리카 사하라사막 남쪽 가장자리)에서 사람들이 마실 물이 없어 탈수로 쓰러지는 것은, 무엇보다 사회적 문제, 즉 ‘타자의 문제’로 간주된다.
물론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나 독일의 극우 정당 ‘독일을 위한 대안’(AfD)이 선거에서 승리하거나, 최근 핀란드에서처럼 네오나치 성향 인물이 경제부 장관(최근 사퇴했음)으로 발탁되면, 기후전환에 더 이상 크게 기대할 수 없게 된다. 이른바 ‘정치적 티핑포인트’(지구 평균 기온이 산업화 전보다 1.5도 이상 높아지면 인류의 노력으로 기후변화를 막을 수 없게 되는데 이를 ‘티핑포인트’라고 한다) 상태가 되는 것이다.
진지하게 생각해보자. 이런 관점에서 접근한다면 복지는 기후보호의 하위 가치에 불과해진다. 복지가 기후보호를 향한 사람들의 두려움을 없애주고 저항을 약화시키는 수단 정도에 불과한 것처럼 말이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어쩌면 매달 400유로의 기후보조금이 아니라, 정치권에 협박당하는 느낌을 가지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 Die Zeit 2023년 제29호
Auseinander!
번역 김태영 위원
안나 마이어 economyinsight@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