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집장 편지]
김연기 편집장
지금은 오간 데 없이 사라졌지만 ‘아르헨티나 사람처럼 부유한’(Riche comme un Argentin)이란 말은 한때 서구 사회에서 부유층을 가리킬 때 흔히 쓰던 표현이었습니다. 아르헨티나는 20세기 초만 해도 국내총생산(GDP)이 미국보다 높은 세계 5대 부국에 속했습니다. 그러나 20세기 중후반부터 살인적 인플레이션에 시달리며 국가부도만 9번 겪을 정도로 경제적으로 몰락했습니다.
오랜 경제 위기에 신음한 아르헨티나 국민들은 지난 대선에서 ‘아르헨티나 트럼프’라고 불리는 극우 포퓰리스트 하비에르 밀레이를 대통령으로 뽑았습니다. 구세주를 자처한 밀레이는 취임 후 곧바로 포퓰리즘에 기반한 급진적 정책을 쏟아냈지만, 국민 살림살이는 더 쪼그라들었습니다. 최근 아르헨티나의 빈곤율은 50%를 훌쩍 넘어 20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고, 물가상승률 역시 30년 만에 최고 수준을 뛰어넘어 세계 최악의 인플레이션 국가란 오명을 뒤집어썼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인플레이션의 최대 희생자는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정부의 인플레이션과의 전쟁은 필연적으로 취약계층을 더 고통스럽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우리만 해도 코로나19 환란과 함께 찾아온 인플레이션으로 서민들이 이중의 고통에 시달렸습니다. 급격한 물가상승에 따른 생계비 부담과 금리인상으로 인한 가계부채 이자비용 증가가 그것이지요. 그리고 지금 진행 중인 미국의 대선 정국을 들여다보면 인플레이션 공포가 또다시 전세계를 엄습할 징조가 보입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에 대한 암살 시도 이후 지지층이 세를 모으며 ‘이번 대선은 트럼프가 이길 것’이라는 예측이 퍼지고 있습니다. 예측대로 트럼프가 재집권한다면 물가가 다시 뛰어오르는 ‘트럼플레이션’(트럼프+인플레이션)이 현실화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옵니다. 감세와 무역 전쟁, 확장 재정, 이민자 추방 등 트럼프의 정책은 물가상승을 초래할 강력한 요인들입니다.
2024년 6월26일 조지프 스티글리츠 등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경제학자 16명이 공동으로 트럼플레이션에 대한 경고를 내놓은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트럼프가 소득세 폐지를 위해 모든 수입품에 10% 보편관세를 부과하면 물가 급등이 초래될 것”이라며 “이민자 장벽과 재정 확대까지 더해지면 인플레이션은 걷잡을 수 없게 될 것”이라고 진단했습니다.
밀레이와 마찬가지로 트럼프가 내놓은 공약의 대부분은 대중의 인기만 좇는 포퓰리즘의 전형입니다. 포퓰리즘의 특징 중 하나는 사회 문제에 진정성 있는 해법을 내놓는 것이 아니라 대중이 혹할 그럴싸한 주장만 목청껏 외친다는 것이죠. 포퓰리즘으로 무장한 좌우 정권이 번갈아 집권하면서 살인적 인플레이션을 거듭하다 나라가 거덜 나버린 처참함을 우리는 아르헨티나에서 목도했습니다. 아르헨티나 사례는 남 얘기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 이코노미 인사이트 2024년 9월호
김연기 ykkim@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