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FOCUS] 애물단지 전자폐기물- ② 겉도는 소비자 보호 대책
알렉산더 뎀링 Alexander Demling
에르빈 히츨러 Erwin Hitzler <슈피겔> 기자
▲ 네덜란드인 예룬 페르크는 세컨드사이트의 ‘망막 임플란트’ 덕분에 다시 앞을 볼 수 있게 됐고, 홍보 영상에까지 출연해 활로 과녁을 쏘며 유명해졌다. 하지만 세컨드 사이트가 2019년 파산하면서 어려운 처지에 놓였다. 유튜브 갈무리 |
스마트 전자제품을 파는 회사의 파산은 때로는 실존적인 문제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미국 회사 세컨드사이트(Second Sight)의 고객은 더 이상 앞을 볼 수 없을까봐 걱정이다. 이 미국 스타트업은 유전성 질환으로 서서히 실명하는 사람을 위한 ‘망막 임플란트’를 개발했다. 마이크로컴퓨터 안의 그래픽 장치와 이에 딸린 안경을 통해 환자들은 명확하게는 아니어도 다시 볼 수 있었다. 업체는 소프트웨어 업데이트를 통해 더 잘 볼 수 있게 하겠다는 약속도 했다. 컬러로 볼 수 있도록 하겠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이러한 환자 중 한 명이 네덜란드인 예룬 페르크였다. 40대 중반의 이 남성은 임플란트 덕분에 다시 앞을 볼 수 있게 됐고, 세컨드사이트 홍보 영상에 출연해 활로 과녁을 쏘며 유명해졌다. 하지만 2020년 그가 쓰던 그래픽 장치가 바닥에 떨어져 고장이 났다. 그럼에도 제조업체로부터 교체품을 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세컨드사이트는 이미 2019년 임플란트 및 시각 보조기기의 생산을 중단했고, 이후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으며 대부분의 직원을 내보냈다. 페르크가 지금도 여전히 앞을 볼 수 있는 것은 의사가 ‘리퍼브 시스템’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의 망막 임플란트는 전자폐기물이 됐을 것이다.
▲ ‘자전거계의 테슬라’로 불리던 전기자전거 제조업체인 반무프(Vanmoof)는 2023년 7월 갑작스러운 파산으로 고객들에게 충격을 안겨줬다. 파산 당시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반무프 본사에 전시된 전기자전거가 보인다. REUTERS |
생존 위협하는 먹통 기기
망막 임플란트를 쓸 수 없게 되고, 자동차 문은 열리지 않는다. 자전거는 중고로 팔 수조차 없다. 제조업체의 파산으로 받는 영향은 이처럼 다양하다. 그리고 대부분의 소비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마티아스 바이트너(38)는 검은 티셔츠를 입고 독일 뤼덴샤이트에 있는 자신의 아파트에 앉아 있다. 앞에 놓인 탁자에는 기가셋(Gigaset)의 가정 보안장치가 놓여 있다. 흰색 카메라, 수신기, 현관문과 창문에 매달려 있던 두 개의 센서 전등이다. 세 번째 센서 전등은 화가 나서 던져버려서 없다.
바이트너의 거실에는 글자가 새겨진 화려한 색상의 어린이 매트가 깔려 있다. 그의 막내는 한 살 반이다. 자우어란트(독일 서부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에 있는 지역)의 기계 관리자인 그는 2018년 기가셋 보안 시스템을 구입했다. 당시 첫아이가 아직 어렸는데, 집에 도둑이 들 뻔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이트너는 야간 근무가 잦았고, 앱을 통해 현관문 카메라가 촬영하는 내용을 추적할 수 있었다. 이 보안장치는 수년 동안 그의 아파트를 지켰다. 그런데 2024년 3월 말, 그는 제조업체로부터 지원 중단을 알리는 이메일을 받았고 깜짝 놀랐다. 이틀 뒤 기기는 오프라인 상태가 됐다.
바이트너는 이 시스템을 350유로(약 51만원)를 주고 구입했다. 그가 짜증이 난 것은 돈 때문만이 아니다. 이 보안 장치의 전선이 지나가는 천장 가장자리를 뜯어내야 했기 때문에 속이 상했다. 하지만 그를 가장 분노하게 한 것은 고객을 대하는 회사의 태도였다. 서비스 중단 전 몇 달 동안 그는 기가셋으로부터 이전 카메라의 소프트웨어가 지원되지 않으니, 100유로에 새 카메라를 구입하라는 이메일을 정기적으로 받았다.
스마트폰으로 유명한 기가셋은 이미 그 무렵 파산 신청을 한 상태였다. 바이트너는 손해를 볼 수 있는 상황에서 그나마 운이 좋았다. 당시에는 장난감과 새 카시트를 사는 일이 더 급해 카메라 구매를 계속 미뤘던 것이다.
바덴뷔르템베르크 소비자상담센터에서 일하는 올리버 버틀러는 소비자가 파산 소식을 알기 위해서는 신문의 비즈니스 섹션을 읽거나 파산 공고를 샅샅이 뒤져야 한다고 말했다. 다른 한편으로, 기업도 파산하면 보상을 해주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기업이 어려워지면 보상을 할 형편이 못 되므로, 필연적으로 가격 상승으로 이어진다.”
바이트너가 사용하던 보안시스템을 판매했던 기가셋의 스마트홈 사업부는 결국 문을 닫았다. 전화사업부는 홍콩의 한 전자그룹이 인수했다. 새 회사는 누리집을 통해 더 이상 파산한 사업 부문과는 관련이 없다고 밝혔다. 이 회사는 “우리는 ‘기가셋 스마트 홈/케어’(Gigaset Smart Home/Care)의 유통업체가 아니어서 반품을 받을 수 없다”고 딱 잘라 말했다.
▲ 2021년 11월 미국 ‘로스앤젤레스 오토쇼’에 전시된 피스커의 ‘오션’을 관람객들이 살펴보고 있다. 피스커의 파산으로 오션 구매자들은 9500만원짜리 고가 폐기물을 떠안게 됐다. REUTERS |
파산 건수 증가
바이트너는 아마존에서 여전히 150유로(약 22만원)라는 새 가격에 기가셋 카메라를 파는 판매자를 볼 수 있다고 했다. 기가셋 보안장치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데도 말이다. 이 카메라 구매를 경고하는 고객의 후기가 이제야 서서히 올라오고 있다. 이 카메라는 현재 아마존에서 평점 3.6을 기록하고 있다. “누구나 다 기가셋 전화를 사용했던 적이 있다. 나는 이 회사가 튼튼한 독일 회사라고 믿었다.”
바이트너는 아마존의 자체 상표인 블링크(Blink)에서 새로운 보안장치를 구입했다. 아마존은 세계에서 가장 큰 기업이다. 그러니 이번에는 보안장치를 못 쓰게 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바이트너는 생각한다.
피해를 입은 당사자의 입장에서는 이해할 수 있는 반응이지만, 독일의 기업가 정신과 혁신에는 재앙에 가까운 일이다. 대기업만을 신뢰하는 것이 더 나을까? 스타트업은 대기업보다 훨씬 더 자주 파산한다. 중소기업은 관료주의, 경기 침체, 높은 이자율을 헤쳐 나가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중소기업의 어려움은 최근 몇 주 동안 독일에서 두드러졌다. 2024년 7월에 보고된 파산 건수는 지난 10년 동안 전례가 없었을 정도로 높았다. 할레경제연구소는 개인 기업과 주식회사의 파산 건수가 1406건으로, 1년 전보다 400건 가까이 늘었다고 보고했다. 2023년에는 팬데믹 이전보다 더 많은 기업이 파산했고, 이 중 대부분은 작은 기업들이었다. 소비자들이 신생기업 제품에 등을 돌린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아직 정치권에서는 이에 대한 해결책을 명확히 내놓지 못했다. 독일 정부는 어디서 이 문제를 맡아야 하는지조차 합의하지 못했다. 슈테피 렘케(녹색당)가 장관인 소비자보호부는 마르코 부쉬만(기민당)이 장관인 법무부가 맡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부는 2022년 유럽연합(EU) 지침의 시행으로, 소비자가 디지털 제품을 구매할 때 공급업체의 특별 보증을 받을 권리가 생겼다는 점을 강조한다. 공급업체는 일정 기간 소비자에게 필요한 업데이트를 제공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소비자의 새로운 권리는 공급업체가 파산한 경우에는 보장되지 않는다. 따라서 파산한 경우 법무부가 소비자보호부에 일을 넘기고, 소비자보호부는 다시 소비자 상담센터로 일을 넘기는 식으로 진행된다.
야당은 조금 더 크게 생각한다. 독일 연방의회 ‘기독민주당·기독사회당 연합’(CDU/CSU)의 소비자 보호 대변인인 안야 바이스게르버는 기업이 파산할 때 제품 업데이트와 클라우드 서비스를 일정 기간 계속 제공하거나 보상하는 것을 의무화할 수 있는지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스마트 시스템의 표준화를 통해 파산한 제조업체의 앱 연동 제품이 다른 제조업체의 소프트웨어로 계속 작동하게 하는 것도 가능한 해결책이다. 하지만 유럽 전역을 대상으로 표준화가 이뤄져야 할 것이라고 바이스게르버는 강조했다.
자동차 제조업체인 피스커의 경우 이런 해결책을 적용하기엔 이미 너무 늦었다. 미국에서 피스커에 관한 절차는 곧 이른바 챕터 11에서 챕터 7, 즉 파산으로 전환될 예정이다. 이는 구제가 아닌 청산을 의미한다. 파산관리인은 마지막 3300대의 오션 차량을 뉴욕의 한 리스 회사에 싸게 팔아치우고 있다.
오션 구매자들의 자구책
피스커 차량 소유주들은 이제 자구책을 찾고 있다. 사실 다른 선택지가 없기도 하다. 노르웨이인 옌스 구테는 오션 소유주들의 모임인 ‘피스커 소유주 협회’(Fiskers Owners Association, FOA)의 유럽 코디네이터 중 한 명이다. 이 협회는 자기 자동차가 값비싼 전자폐기물이 되는 것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피스커 소유주들이 모여서 만든 것이다.
FOA에 따르면 8월 초까지 노르웨이, 오스트리아, 미국 등에서 약 4천 명의 회원이 모였다고 한다. 회원들은 지금까지 15만달러 이상을 모았다. 그들은 이 돈으로 예비 부품을 구할 수 있는 인프라를 구축하고 서버 비용을 지불하려고 한다. 그리하여 앞으로 한두 번 정도 업데이트를 할 수 있기를 바란다.
구테와 회원들은 현재 예비 부품 재고가 어디에 보관돼 있는지 알아내기 위해 노력 중이다. 이들은 대형 로펌에 의뢰해 피스커의 파산 절차 과정에서 회원들을 변호하도록 했다. “갑자기 서로 모르는 많은 사람이 함께 일하게 된 것을 생각하면, 꽤 조직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투자 은행가로 일했던 구테처럼 많은 소유주가 전문가로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던 것도 장점이다. FOA는 “어쩔 수 없이 하게 된 모험”이라고 그는 말했다. “우리는 자동차를 살리려고 노력하고 있다.”
ⓒ Der Spiegel 2024년 제3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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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이상익 위원
알렉산더 뎀링 economyinsight@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