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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가 벗긴 미국 ‘포킨 빌리지’

기사승인 [129호] 2021.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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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VER STORY] 바이든 시대의 미국- ④ 뉴욕 르포

화려함의 대명사 국제도시 미국 뉴욕이 코로나19 대유행을 거치면서 1980년대의 텅 비고 춥고 지저분한 위험도시로 돌아갔다. 관광객의 발걸음이 끊겼고, 부유층은 뉴욕 롱아일랜드 햄프턴 별장에서 겨울을 나고 있다. 코로나19가 기승을 부리는 뉴욕 길거리에는 직장인과 택배기사, 빈곤층만이 남았다.

세라 파인스 Sarah Pines 자유기고가

   
▲ 폐허로 변한 세계적인 도시 미국 뉴욕주 맨해튼 거리에서 한 노숙인이 잠자고 있다. REUTERS

빛의 도시. 빛은 환하게 비치거나 팔락거리거나 반짝거리거나 빙글빙글 돈다. 해가 단 한 번도 비치지 않고, 비가 단 한 번도 더러움을 씻어내지도 않고, 꽃 한 송이 자라지 않는 황량한 길에 비치는 빛.
뉴욕을 단기간이나 장기간 방문한 사람들은 이곳이야말로 인생 최대의 사랑이라고 굳게 믿는다. 몇 달 전만 해도 뉴욕은 자유주의라는 상식을 발판으로 굳건하게 딛고 움직이는 곳이었다. 뉴요커들은 전세계가 동네고, 우리는 모두 세계화 혜택을 받고 있으며, 모두 활기찬 ‘세계 시민’ 코즈모폴리턴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코로나19 대유행(팬데믹)으로 셧다운(폐쇄)한 뒤 뉴욕의 공허함이 그대로 노출됐다. 폐쇄된 뉴욕은 부끄러운 실제 모습을 감추기 위한 눈가림 마을인 ‘포킨 빌리지’(1787년 러시아 예카테리나 2세가 시찰을 나오자 환심을 사기 위해 화려한 가짜 마을을 만든 그리고리 포킨 총독 사례에서 유래했다. 현실과 상관없이 겉보기엔 행복한 허울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에 불과함을 드러냈다.
코로나19 확산으로 인파와 일상의 분주함이 사라지자, 뉴욕의 화려한 외피가 완전히 걷혔다.

   
▲ 2020년 4월 코로나19로 수많은 사망자가 나온 뉴욕에서 장례업체 직원들이 주검을 옮기고 있다. REUTERS

텅 빈 세계의 중심 도시
2020년 11월3일 대통령선거 주간이 시작되자 뉴욕은 잠시나마 활기를 되찾았다. 낮 기온 23도를 기록하면서 여름이 되돌아온 듯했다. 집집이 “투표하세요”(Vote)라는 포스터가 붙었고, 학생들은 미국 국기 색으로 옷을 맞춰 입기도 했다. 방송사 <CNN>과 <ABC>에서 중계하는 대통령 당선인 목소리가 미국 전역의 일반 가정집과 매장에 울려퍼졌다. 조 바이든의 목소리에 장군의 무게감과 샘 아저씨의 친근함이 실려 있다.
대선 전날 밤, 센트럴파크 북쪽 암스테르담애비뉴. 라틴계 남성 몇 명이 셔츠 단추를 몇 개 풀어놓은 채 저가 상품 매장 앞에서 한창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들이 단호한 어조로 ‘대통령’(El presidente)이란 단어를 몇 번이나 말하는 것을, 나는 그들 앞을 지나가며 들을 수 있었다.
2020년 11월7일 토요일 오전, 조 바이든 당선이 확정됐다는 속보가 떴다. 라틴계 남성들이 서 있던 보도에는 이제 작은 레스토랑이 세운 임시 야외 텐트만 덩그러니 남아 있다. 라틴계 남성들은 보이지 않는다. 야외 텐트에선 젊은 백인들이 뮤즐리(곡물, 견과류, 말린 과일 따위를 섞은 것)와 주스를 먹고 있다.
길에서 북과 종소리에 맞춰 흥겹게 장단을 맞추는 사람들도 보인다. 청소부와 음료 배달원이 이들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무게중심을 잡으며 지나갔다. 뉴욕 거리를 다니는 대다수는 흑인이다. 바이든-해리스 펼침막을 든 여성 한 무리가 공원을 가로질러 간다. 이들 앞에 6살 정도로 보이는 어린이들이 앞장서서 “트럼프는 더는 안 돼”(No more Trump!)를 외쳤다. 뉴욕시 부유한 지구인 어퍼이스트사이드에선 야심한 밤까지 폭죽이 간간이 터지거나 삼바 음악이 들려왔다. 파크애비뉴는 쥐 죽은 듯 고요했다.
나는 다음날 아침 도심을 산책했다. 어퍼이스트사이드에선 개미 한 마리 찾아볼 수 없었다. 한 택시의 열린 창문으로 발리우드 음악이 흘러나왔다. 택배기사들이 아스팔트 도로 위로 ‘다고스티노’와 ‘그리스테데스’ 대형마트 상자를 실은 카트를 끌고 간다. 제복을 입은 호텔 직원은 호텔 출입문 손잡이를 손세정제로 닦고, 황금색 출입문 앞에서 호수에서 힘차게 쏟아져나오는 물로 인도의 먼지와 낙엽을 씻겨 보냈다.
뉴욕 센트럴파크의 작은 호수 가장자리에 한 에너지 넘치는 뉴요커가 캔버스 스탠드를 세워놓았다. 전문 화가 솜씨는 아니지만 캔버스에는 경작지, 붉은색 낙엽과 나무, 지붕이 그려졌다. 센트럴파크의 벤치와 잔디밭 여기저기에 사람들이 거리를 두고 흩어져 앉아 있다. 마스크를 쓴 사람들이 태양을 바라보며 일광욕을 즐기고 있다.
센트럴파크 동쪽은 깨끗하고, 나머지 지역은 지저분하다. 쓰레기를 한곳에 모으거나 길거리에서 쓰레기를 치우는 수고를 하려는 시민이 아무래도 없는 모양이다. 길거리 곳곳에 사람들이 뱉은 침, 주스 흔적과 양념 묻은 닭뼈가 행인들의 발에 짓밟힌 듯 어지러이 흩어졌다. 플라스틱 포대와 얼룩이 묻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더미가 올려진 쓰레기통은 쓰레기가 차고 넘쳐 뚜껑을 덮을 수 없다. 허름한 행색의 노숙자들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할렘과 브롱크스 방향에서 오는 버스에는 몸이 불편한 사람들이 보인다. 한 젊은 흑인 여성은 휠체어를 타고 있다. 여성의 다리는 마비된 것 같다. 그의 발가락이 바닥을 쓸고 있다. 흰색 양말 사이로 피가 흐르고 있다.
이스트 84번가에서 큰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쓰고 한 손엔 테이크아웃 커피를 든 여성이 인적이 드문 도로에서 산책 중인 한 가족을 향해 외친다. “마스크를 쓰라고! 너희는 그게 무슨 말인지 대체 이해가 안 되냐고?”
뉴욕은 도착의 장소이자, 자아에 대한 궁극의 도전 장소이다. 뉴욕에선 자신이 필요로 하는 것보다 항상 더 많은 것을 얻는다. 노래 <뉴욕 뉴욕>에 ‘만약 내가 그곳에서 해낼 수 있다면 난 어디서든 해내겠지’라는 가사도 있지 않은가.
그러나 이제 뉴욕은 텅 비어버렸다. 투자자나 관광객도 없다. 파티와 전시회 개막식, 디너 일정을 정신 차릴 새 없이 오가는 야단법석도 찾아볼 수 없다. 아스팔트 도로 위를 또각또각 걸어가는 하이힐 소리도 사라졌다. 사람들 앞에선 활짝 웃다가 대기 중인 운전사 딸린 자가용에 앉는 순간 웃음기가 싹 사라지는 뉴요커들도 일순간에 사라졌다. 가발과 메이크업 파우더, 모피 스카프가 일제히 자취를 감춘 뉴욕은 기름기 하나 없이 비쩍 말라 있다.
브로드웨이는 이미 수개월째 문을 닫았고,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는 앞으로 1년간 더 문을 닫는다. 쇼, 깜빡이는 빛과 화려함이 사라졌다. 화려한 의상과 두둑한 돈지갑, 대형 예술상들 역시 자취를 감추었다. 나는 잔잔한 바닷바람이 불고 넓은 테라스에 바스켓 의자, 줄무늬 차양과 바닷가재 샌드위치가 차려진 햄프턴으로 향했다.

   
▲ 2020년 12월 미국 뉴욕주 청사 앞에 사람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REUTERS

노숙자 보금자리로 바뀐 호텔
햄프턴도 뉴욕의 여느 지역과 마찬가지로 생기가 사라졌다. 햄프턴 부유층의 삶을 떠받들어온 건물관리인, 기사, 하청업체, 가사도우미 등 ‘서비스업 직종자’들은 실업자가 되었다. 반려견 8~9마리를 한꺼번에 데리고 나온 반려견 산책 도우미들도 어느 순간 모두 사라졌다. 하지만 인도 위에는 여전히 개똥 무더기와 오줌 바다가 곳곳에서 보인다. 공원에서 유모차를 끌고 산책하는 아이돌보미들 역시 거의 보이지 않았다.
코로나19가 유행하기 전만 해도 유모차를 끌고 나온 아이돌보미로 인산인해를 이룰 정도였다. 그때는 아이돌보미들을 댄스스쿨, 음악스쿨, 버스정류장 등 어디에서나 볼 수 있었다. “딸아이는 3월부터 댄스스쿨에 다니지 않고 있다”고 통통한 소녀의 아버지가 말했다. “일제히 댄스스쿨 문을 닫으면서 딸아이의 발레 경력이 망가졌다.”
소녀의 아버지는 빌 더블라지오 뉴욕시장 관저 그래시맨션으로 짐작되는 방향을 가리켰다. 시장 관저는 이스트강변에 있는 남부 대농장 스타일의 빌라다. 미국에서 에너지 소비량이 가장 많은 가구로 알려졌다.
어퍼웨스트사이드에서도 수많은 상점과 레스토랑이 문을 닫았다. 그중 다수는 다시 문을 열지 못할 것이다. 많은 상점과 레스토랑의 창문이 내부에서 종이나 신문으로 가려져 있다. 웨스트 79번가의 세련된 루체른호텔은 2020년 7월부터 노숙자 보금자리로 사용되고 있다. 루체른호텔 인근에서 마약에 취한 듯한 몇 명이 뉴욕시가 2016년 시작한 무료 와이파이 서비스 링크 NYC 키오스크를 들여다보며 알아듣기 힘든 말을 중얼거린다. 요즘 길거리에서 NYC 키오스크를 쓰는 뉴요커는 찾아보기 어렵다.
센트럴파크 서쪽으로 눈부신 녹색 자전거길이 펼쳐진다. 하지만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뉴요커는 찾아보기 힘들다. 일반 주택에는 자전거를 세워둘 공간이 부족하다. 한 여성 청소부가 웨스트 106번가로 걸어간다. 그는 25년 전 폴란드에서 미국으로 이주했다. 폴란드에서 기업체를 운영했다. “트럼프가 대선에서 졌는데, 이제 어떤 일이 벌어지는 거죠?” 그의 눈이 촉촉하게 젖었다. 상대방은 그의 시선을 피한다.
이른 오후, 컬럼비아대학 인근. 행인들은 염색된 마스크나 유기농 섬유 마스크를 쓰고 있다. 저렴한 일회용 마스크를 쓴 사람은 취약계층뿐이다. 마스크를 쓰지 않은 일부 사람에게 비난 어린 시선이 쏟아진다.
브로드웨이 110번가에 있는 한 슈퍼마켓에서 남루한 옷차림의 라틴계 여성이 콩요리와 타말리(옥수수 반죽 안에 양념 고기나 채소가 들어간 음식)를 팔고 있다. 그의 짐은 모두 슈퍼마켓 카트에 들어 있다. 그는 아침 일찍 일어나 집에서 음식을 만든다. 그는 집 위치를 알려주려는 듯 업타운, 할렘 방향을 손으로 가리킨다. 공사장 안전모를 쓴 라틴계 남성 몇 명이 그의 음식을 산다. 그 외에 슈퍼마켓에서 그에게 눈길을 주고 음식을 사는 사람은 없다.
록펠러센터 인근 피프스애비뉴의 트럼프타워 앞에서 한 남성이 4년 전부터 “트럼프, 꺼져라!”라고 쓰인 팻말을 들고 1인시위를 한다. 그가 항상 같은 내용의 팻말을 들고 시위했는지는 알 수 없다.
늦여름, 이스트강에 트럼프의 대선 홍보용 보트가 떠다니고 있다. 이런 홍보전은 실패였을까? 모든 사람에게 그런 것은 아닌 듯하다. “도널드 트럼프는 우리를 위해 그의 삶을 내주고 있다”고 우디 앨런을 닮은 브루클린의 한 택시기사가 대선 직전에 말했다. “트럼프는 우리를 위해 하이드록시 클로로퀸(말라리아 치료제로 류머티즘 관절염이나 루프스 등의 예방에도 사용된다)을 복용했다. 어떤 대통령이 이런 일을 하겠는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누구도 그러지 못할 것이다.”
브로드웨이에서 흰 수염을 길게 기른 노숙인 할아버지가 무릎담요를 덮은 채 휠체어에 앉아 있다. 옆에는 불룩한 짐가방이 놓여 있다. 한 여성 행인이 양피지에 싼 빵을 내밀자, 그는 거부하듯 손을 흔들어 보이며 저주를 퍼붓는다. “지옥으로 가!”
리버사이드파크 인근에서 한 중년 여성이 고령의 동글동글한 골든레트리버를 조그만 반려견 유모차에 태워 끌고 간다. 할머니 두 명이 가까이 다가가서 골든레트리버가 귀엽다는 듯 유모차 안을 들여다본다.

   
▲ 2020년 11월 마스크를 쓴 남성이 뉴욕주 맨해튼의 한 교회 밖에서 총을 들고 서성이고 있다. REUTERS

“개는 건강한가요?”
“아, 잘 모르겠어요. 계속 몸무게가 빠지는 것 같아요. 하여튼 바깥 공기를 좋아합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아, 골든레트리버가 두 분을 알아보네요!”
이들로부터 머리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면 시선 끝에 한 주택의 17층 옥상에 뚱뚱한 노인이 망원경으로 허드슨강 보트들을 바라보는 것이 보인다. 그의 아내는 바람이 심하게 불어 담요로 몸을 감싸고 마스크를 쓴 채 옆에 앉아 있다. 항암치료로 아내의 머리카락이 가늘어졌다. 테이블 위에는 프레츨(밀가루 반죽을 하트 모양으로 매듭을 만든 다음 소금을 뿌려 구운 비스킷)과 맥주 두 잔이 놓여 있다.

   
▲ 2020년 11월 뉴욕의 텅 빈 거리에 마스크를 쓴 사람이 보인다. 길가에 쥐떼가 나타나도 이제 행인들은 놀라지 않는다. REUTERS

관광객이 사라진 소호
뉴욕 맨해튼의 미드타운. 어두운 조명의 술집에 퇴근 뒤 한잔을 즐기는, 근사하게 차려입은 수많은 사람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화려함은 이제 더는 찾아볼 수 없다. 대신 임시로 마련한 테이블과 의자, 파라솔이 술집 앞 아스팔트 인도를 점령했다.
테이블에 앉아 있는 한 남자가 여자 쪽으로 몸을 가까이 기울인다. 여자는 전 남자친구와 불과 2주 전에 헤어졌다며 남자친구가 자신에게 어떻게 그럴 수 있냐며 혼잣말에 가까운 말을 남자에게 중얼거린다. 이날 저녁은 허드슨강과 이스트강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공기를 도심에서도 체감할 정도로 바람이 매서웠다. 여자는 방금 굴을 먹었다. 그는 그녀의 날숨에서 묻어 나오는 굴 냄새를 감지했는지,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여자는 킥킥 웃으며 자신의 엉덩이를 그의 엉덩이 쪽으로 갖다 댄다. 술집에 앉아 남녀가 데이트하는 현장을 훔쳐보고 있노라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대도시 뉴욕의 텅 빈 어두운 술집에서 말이다.
술집에는 퀴퀴한 목재 냄새가 은근히 배어 있다. 여자는 남자에게 태평양 바다가 자신의 신발을 집어삼킨 적이 있는데, 전 남자친구는 왜 집어삼키지 못했는지 원망스럽다고 말한다.
소호(SOHO). 문 닫은 상점들. 소호에도 관광객 무리와 손님들이 자취를 싹 감췄다. 사람들 모습이 사라지니 소호 건물이 어느 때보다 두드러져 보인다. 블리커스트리트에서 키 큰 소방관이 한 빵집에서 레드벨벳케이크 한 조각과 스모어(구운 마시멜로를 초콜릿과 함께 크래커에 끼워서 먹는 캠프용 간식)를 사고 있다. 소방관은 주머니에서 8달러를 꺼내 계산한다. 붉은 소방차를 향해 경건한 마음으로 걸어가는 그의 큰 손에 들린 분홍색 케이크 상자가 유난히 작아 보인다.
뉴욕 리틀 이탈리아의 레스토랑들 앞에 달린 초록색-흰색-빨간색 종이 장식은 쓸쓸하게 걸린 서커스 가랜드(긴 줄로 된 장식)와 어딘지 닮았다. 엘리자베스스트리트 교차로의 토마토소스 상점 창문에 마피아 전문 배우 비니 벨라 포스터가 붙어 있다. 상점이 아예 문을 닫은 건지, 그냥 점심시간이라 잠깐 닫은 건지는 분명하지 않다. 비니 벨라는 2019년 봄에 사망했다. 그는 소호 주민을 모두 알고 지냈다고 할 만큼 마당발이었다고 한다. 벨라는 생전에 오래된 둥그런 그릴에서 스테이크를 굽고, 그의 친구 로버트 드니로에 대해 말하는 것을 즐겼다.
1940년대 후반 문을 열었던 한 모차렐라 상점은 코로나19 대유행 이후 계속 문을 닫은 상태다. 쇼윈도에는 말라 비틀어진 리가토니(속이 빈 튜브형 짧은 파스타) 몇 개가 보인다. 어디에선가 들려오는 가수 엘라 피츠제럴드의 노래 <맨해튼>을 듣고 있노라니 목이 잠시 메었다.
차이나타운. 마치 색바랜 일러스트레이션의 한 장면처럼 회색 윗옷에 땋은 머리를 한 중국 할머니가 바구니형 카트에 길거리 쓰레기를 집어 담고 있다. 중국음식점 진열장에는 머리 없는 구운 오리고기가 걸려 있다.
중국인 남성이 붉은 베레모를 쓰고 붉은 티셔츠를 입은 남성에게 미주알고주알 잔소리를 늘어놓고 있다. “단 하루도 집에 있지 않고 계속 돌아다니지 않았습니까? 중국에서 아픈 몸으로 귀국해서는,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외출하셨죠?” 건어물 매장에서 흐느끼는 듯한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마치 과거로 돌아간 것 같다”고 붉은 베레모를 쓴 시민운동가 커티스 슬리와는 말했다. 슬리와는 1979년 뉴욕에서 비폭력주의 자경단 ‘수호천사’(Guardian Angels)를 결성했다. 그의 손이 가볍게 떨린다.
슬리와는 파킨슨병을 앓고 있다. “요즘은 마치 1980년대로 돌아간 것 같다. 범죄율이나 길거리에서 습격당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에게 마스크를 쓰지 않은 이유를 물었다. “나는 적잖은 노숙자와 몇 년째 알고 지낸다. 그들은 나를 신뢰한다. 많은 노숙자가 마약을 하며 환각 상태에서 돌아다닌다. 내가 그들을 돌보며 음식을 가져다줄 때, 그들은 내 얼굴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아주 두려워한다.”
뉴욕에서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 1990년대 그는 뉴욕의 마피아 대부 존 고티의 사주로 택시에서 납치돼 총을 몇 차례 맞기도 했다. 그는 자동차 창문으로 빠져나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요즘 뉴욕은 고통 없이 더럽혀진 싸움터이자,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와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가 나는 도시다. 2020년 4월만 해도 사람들은 거리에 출몰하는 쥐떼를 보면 호들갑을 떨었다. 이제는 쥐떼 따위에 관심 두는 사람은 없다. 뉴욕 길거리의 단풍나무는 눈부시게 노랗다.
뉴욕에서 잠적하거나 다시는 재기할 수 없도록 쓰러지기란 어렵지 않다. 사라지는 이유는 몹시 가난하거나, 정반대로 엄청난 부를 쌓았거나 무엇이든 될 수 있다. 뉴욕 어디에서나 샌드위치, 수프, 치킨, 훈제연어 등을 포장해서 살 수 있고 문 앞까지 배달된다. 뉴욕이 언제 어디서나 음식으로 넘쳐나고, 뉴요커들이 먹는 양을 보노라면 놀랍기 그지없다.

ⓒ Die Zeit 2020년 제47호
New York, New York
번역 김태영 위원

세라 파인스 economyinsigh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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