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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독감이 만든 할리우드

기사승인 [134호] 2021.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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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중기획] 갈림길에 선 할리우드① 탄생과 비상

라르스올라프 바이어 Lars-Olav Beier 로타어 고리스 Lothar Gorris
볼프강 회벨 Wolfgang Höbel 올리버 케버 Oliver Kaever
하나 필라르치크 Hannah Pilarczyk
<슈피겔> 기자

   
▲ 100여 년 전 스페인 독감과 제1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할리우드는 지금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세계 최대 규모, 최고의 영향력을 가진 할리우드로 탄생했다. 스페인 독감이 창궐한 1918년 미국 세인트루이스에서 마스크를 쓴 여성들이 환자를 나르기 위한 들것을 들고 있다. REUTERS


해당 장면은 딱 16초 이어졌다. 근대 최악의 팬데믹에 할애된 장면의 분량은 16초. 그나마 장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할리우드 영화에서 스페인 독감을 다룬 유일한 장면일 것이다. 스페인 독감이 역사적으로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보일 정도다.
스페인 독감을 다룬 장면은 1919년 제작한 무성영화 <키다리 아저씨>(Daddy-Long-Legs)에 나온다. 메리 픽퍼드가 주인공 제루샤 애벗 역을 했다. 할리우드는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한 지역에 불과했고, 아직 글로벌 영화 권력으로 떠오르기 전인 무성영화 시대에 픽퍼드는 ‘영화의 여왕’이자 ‘미국의 연인’으로 불릴 정도로 명성을 누렸다. 154㎝ 단신의 청순형 여배우 픽퍼드는 성인의 나이에도 주로 귀엽고 착하면서도 강인한 소녀 역을 맡았다. 이제 막 비상을 시작한 영화업계를 좌지우지하는 남성들 사이에서 금발의 곱슬머리 픽퍼드는 유일하게 목소리를 내는 여배우였다. 영화산업에서 능력을 발휘한 제작자이기도 한 그녀는 자신이 제작하는 영화의 콘텐츠를 결정했고 수익의 절반을 받았다.

   
▲ 무성영화 시대를 상징하는 인물인 메리 픽퍼드는 ‘영화의 여왕’이자 ‘미국의 연인’으로 불리며 화려한 영화의 시대를 열었다. 할리우드 역사 기념 센터에서 안내자가 픽퍼드의 초상화 앞에서 방문객들에게 설명하고 있다. REUTERS

무성영화계 ‘브란젤리나’ 커플
남편 더글러스 페어뱅크스와 함께 픽퍼드는 20세기 최초의 유명인 부부였는데, 요즘으로 치면 무성영화계 브란젤리나(브래드 피트와 앤젤리나 졸리) 커플에 해당했다. 이 부부는 베벌리힐스의 자택 빌라 픽페어에서 아인슈타인이나 윈저 공작 등 유명인들과 교류했다. 찰리 채플린과 함께 이 부부는 영화사 유나이티드아티스츠(United Artists)를 공동설립해, 그때까지 배우와 감독에게는 낯설던 강력한 자립성을 부여했다. 픽퍼드는 오스카상 초창기 설립 멤버였다. 한 영화제작사 대표는 픽퍼드가 철강 공장장 역도 훌륭하게 해냈을 거라고 말했다. 픽퍼드는 카메라 앞에서나 뒤에서나 할리우드 최초의 슈퍼 영웅이었다.
무성영화 <키다리 아저씨>는 전형적인 메리 픽퍼드 영화에 속한다. 익명의 상류층 중년 후원자가 한 고아 소녀가 빈곤에서 벗어나도록 물심양면 도와주는 이야기다. 소녀는 자신의 불우한 환경에 당당히 맞서는 한편, 키다리 아저씨가 누구인지 모른 채 사랑에 빠진다. 상류층의 위선을 꼬집은 유쾌한 로맨틱 코미디다.
<키다리 아저씨>에는 기차역 장면이 나온다. 소녀는 입학을 앞두고 대학에 가는 길인데 그만 아주 늦어버렸다. 기차역은 인파로 발 디딜 틈이 없다. 소녀가 재채기를 하자 주위 사람들이 깜짝 놀라 모두 황급히 옆으로 비킨다. 몇몇 사람은 마스크를 썼는데 ‘코스크’(코를 내놓고 마스크를 쓰는 것)를 한 이도 있다.
영화 속 등장인물의 ‘코스크’는 황당한 모습임이 틀림없다. 코로나19 팬데믹을 겪는 지금은 더욱 그렇다. 하지만 102년 전에 촬영한 전형적인 무성영화의 유머 코드를 녹여낸 이 장면은 사람들의 바이러스에 대한 두려움을 희화화했다. 촬영 당시 배우 픽퍼드도 스페인 독감에서 겨우 회복된 상태였다.
당시 100만달러 이상 수익을 낸 무성영화 <키다리 아저씨>는 영화 아카이브(기록 보관)에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 픽퍼드도 수많은 무성영화 스타와 마찬가지로 유성영화에 적응하는 데 애먹었다. 이후 픽퍼드는 페어뱅크스와 이혼했고 알코올중독에 빠졌다. 그는 1933년 영화계에서 은퇴했으며 1979년 사망했다. 픽퍼드는 할리우드를 만들어낸 이였고 20세기 초기 페미니즘 아이콘이라는 명성을 누릴 자격이 있다. 하지만 지금 픽퍼드를 알고 기억하는 사람이 대체 몇 명이나 되는가?
할리우드에는 기억력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100년 전 스페인 독감과 제1차 세계대전은 모든 것을 뒤흔들어놓았다. 팬데믹과 전쟁을 거치며 할리우드는 지금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세계 최대 규모, 최고의 영향력을 가진 할리우드로 탄생했다. 가히 영화계 대분열(The Great Disruption)이 아닐 수 없다. 현대 할리우드는 팬데믹과 함께 시작됐고, 어쩌면 또 다른 팬데믹으로 막을 내리고 있는지 모른다.

   
▲ 할리우드 최초의 제대로 된 형태를 갖춘 영화제작사는‘파라마운트픽처스’다. 2015년 7월27일 미국 뉴욕에서 유명 영화배우 톰 크루즈가 당시 파라마운트픽처스 회장인 브래드 그레이와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REUTERS

스페인 독감 영화계 강타
천재지변에는 동기가 있을 수 없다. 천재지변은 갑작스레 닥치는 법이며, 그냥 일어났고 때로 아주 고약하게 펼쳐진다. 유럽에서 1차 대전이 한창이던 1918년 봄, 스페인 독감은 전세계에 불어닥쳤다.
그해 봄과 가을, 다음해 봄을 지나며 변종 바이러스는 전 지구를 덮쳤다. 당시 15억 명가량인 세계 인구의 약 3분의 1이 스페인 독감에 걸렸다. 5천만 명, 어쩌면 1억 명이 스페인 독감으로 죽었다. 정확한 사망자 수는 알려진 바 없다. 1차 대전으로 사망한 이는 2천만 명에 달했다. 전쟁과 감염병 대유행이 함께 닥친 것은 인간이 정신적으로 소화하기에 무리였다. 1차 대전에 관해 출간된 책은 8만여 종이지만 스페인 독감에 관한 책은 400종에 불과하다. 전쟁 시기 검열은 스페인 독감을 망각시키고 밀어내기에 충분했다.
코로나19 팬데믹을 겪는 현대인에게 당시 상황은 익숙하게 다가올 것이다. 당시 미국 언론은 재채기하는 사람을 피하라고 독자에게 경고했다. 그리고 환기되지 않은 실내에 들어가지 말라고, 감기에 걸리면 집에 머물라고, 걱정과 두려움, 피로에서 자신을 보호하고 마스크를 쓰라고도 경고했다.
검역소가 설치됐고 학교, 놀이공원, 교회는 폐쇄됐다가 너무 일찍 다시 문을 열었다. 일부 지역에선 술집과 상점이 계속 문을 열었다. 그러나 미국 전역에서 영화관은 대부분 폐쇄됐다. 보건 당국은 영화업계에 엄격한 방역 대책을 적용했고, 영화제작자들은 영화 제작을 중단했다. 로스앤젤레스 영화관들은 7주간 영화를 상영하지 못했다. 수많은 도시에서 영화관은 몇 달 내내 문을 닫았다. 그 상황에서 문을 열었던 영화관 대표들은 체포됐고, 법정 소송을 제기한 영화관 대표들도 있었다. 마스크 착용이 의무화됐고 영화관 좌석은 통제됐다. 스페인 독감으로 전세계는 아비규환 상태가 됐다. 팬데믹 상황은 악화일로를 걸었다. 그리고 1919년 여름 스페인 독감은 서서히, 스스로 사그라졌다.
영국 작가 로라 스피니는 저서 <창백한 기사: 1918년 스페인 독감은 세계를 어떻게 바꾸었는가>(Pale Rider: The Spanish Flug of 1918 and How it Changed the World)에서 스페인 독감이 대유행했을 때, 세계는 자동차를 발명할 정도로 기술이 발전했지만 여전히 당나귀 등에서 더 편안함을 느끼던 모순덩어리였다고 적었다. 1918년 인류는 양자이론을 파악했으면서도 여전히 마녀의 존재를 믿고 있었다. 팬데믹 자체에는 현대적 특성이 없지만, 당시 팬데믹은 새로운 세상을 만들었다. 그리고 스페인 독감 대유행 이후 오늘날 우리가 잘 아는 할리우드가 탄생했다.
스페인 독감이 발생하기 몇 년 전, 영화관은 상당한 발전을 했다. 영화제작사와 배급사는 영화관 2만여 곳에 영화를 배급했다. 이 중에는 필름을 상영할 수 있도록 대충 개조한 상점 공간이거나 프로젝터와 피아노, 의자 몇 개를 구비한 술집에 불과한 곳도 있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커튼과 빈백(신축성이 좋고 푹신한 의자)을 갖춘 영화관이 생겨났고, 최초의 멀티플렉스(복합상영관)가 문을 열었다. 영화관에서 찰리 채플린이나 메리 픽퍼드를 대형 스크린으로 보는 건 당시 미국인들에게 최대 여가선용이 됐다.
20세기 초 수많은 영화관은 가족이 대규모 자본 없이 운영하는 소기업이어서 국가가 지원해주지 않으면 팬데믹에 따른 영화관 폐쇄 기간을 재정적으로 극복하리라는 희망을 품을 수 없었다. 팬데믹이 종식되더라도 사람들이 과연 영화관으로 돌아올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았다. 아니면 사람들의 영화에 대한 급작스러운 열정이 꺼져버린 건 아니었을까?
아돌프 주커는 영화를 굳건히 믿었던 사람이다. 헝가리 시골 마을에서 고아로 자라난 주커는, 1889년 16살 나이에 미국으로 이민했다. 그는 20살에 모피업을 운영해 큰 성공을 거두었다. 주커는 엄청난 추진력을 가진 성공지향적 청년으로, 영화관과 상영 공간을 보유했다. 하지만 상영할 영화가 많지 않자, 주커는 스스로 영화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그의 영화사 ‘페이머스 플레이어스’(Famous Players)는 당시 팽창하던 영화시장에서 최대 규모를 자랑했다. 픽퍼드와 전속계약을 한 이도 주커였다. 사업 번성을 위해 그의 영화사에는 영화관과 영화 외에 스타들이 필요했다. 당시 픽퍼드는 10대 후반이었다. 픽퍼드의 꿈은 20살이 되면 연간 2만달러를 버는 것이었는데, 자신이 거의 20살이 돼간다고 당시 주커에게 말했다. 주커는 픽퍼드와의 전속계약서에 연간 2만달러를 적었다. 이 액수는 머지않아 10만달러로 늘어났다. “메리는 위대한 비즈니스우먼”이었다고 주커는 말한 바 있다.

파라마운트픽처스 탄생
주커는 스페인 독감의 직격탄을 맞고 재정난에 처한 영화관들을 사들였다. 영화관을 팔지 않겠다는 곳에는 도로 건너편에 새 영화관을 열겠다고 협박했다. 1953년 출판된 그의 자서전 제목은 <대중은 결코 틀리지 않다>(The Public is Never Wrong)였다.
주커는 후일 할리우드 최초의 제대로 된 형태를 갖춘 영화제작사 파라마운트픽처스(Paramount Pictures)의 회장이 됐다. 영화, 영화관 그리고 스타까지 하나씩 자기 소유로 만들었다. 헨리 포드가 자동차를 공장에서 대량 제작하는 것처럼, 주커는 영화를 ‘컨베이어벨트’에서 쉼 없이 뽑아냈다. 영화 제작에서 배급까지 원스톱으로 제공했다. 주커는 무법천지 영화계에 시스템을 만들었고 자신의 신생 기업을 독점기업으로 만들었다.
주커의 사업모델은 할리우드 스튜디오 시스템의 전형이 됐다. 주커는 팬데믹이 종식된 1921년 직후에 최초의 글로벌 블록버스터 <네 기수의 묵시록>(The Four Horsemen of the Apocalyse)을 제작했다. 이후 1920년대 영화계는 날개를 달고 비상했다.

ⓒ Der Supigel 2021년 제17호
Filmriss
번역 김태영 위원

라르스올라프 바이어 economyinsight@hani.co.kr

<저작권자 © 이코노미인사이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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